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금강 상류를 따라 백제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는 국경의 요새였다. 671년(문무왕 11)에 신라인 취도(驟徒)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천성 싸움에서 전사하였고, 655년(무열왕 2)에 김흠운(金歆運)은 낭당대감(郎幢大監)이 되어 양산 아래 조천성을 공략하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뒤에 김유신에 의하여 성이 점령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 말기까지 옥천군에 속하였으며, 성의 유적이 비봉산(飛鳳山) 지역에 오래 남아 있었다. 영동과 금산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