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임존성은 전체 둘레가 2,462m에 이르는 삼국시대 최대급 산성이다. 더구나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 시기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한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산성이다. 또한 장방형(長方形)으로 가공한 성돌로 성벽 전체를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여 고고학적으로도 성곽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산성이다. 그렇지만 축조 목적이나 축조 배경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어 예산 임존성을 축조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제부흥운동기에 거점성으로 사용된 곳이니만큼 백제의 서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굴복해 항복하였다. 이때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무리를 거느리고 함께 항복하게 된다. 나당 연합군이 의자왕을 옥에 가두고 군사들을 풀어 심하게 노략질을 하자 이를 두려워한 흑치상지는 좌우 추장(酋長) 10여 명과 함께 도망쳐 임존산(任存山)을 기반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8월 26일 나당 연합군이 임존성을 공격하자 백제 부흥군은 험한 지세를 이용해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이를 통해 임존성은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성 중 하나가 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군에 내분이 일어나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살해하고 풍왕(豊王)이 복신을 살해하는 과정을 겪으며 흑치상지도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그 후 흑치상지가 임존성을 공격함으로써 임존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후삼국시기에 이르면, 예산 임존성은 후백제와 고려의 주요 접전지가 되었다.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5년에 예산 임존성을 함락시킴으로써 후삼국 통일을 위한 결정적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예산 임존성은 해발 484m의 봉수산 정상부에서 중복(中腹)에 걸쳐 삼태기식으로 축조된 석성이다. 성내 지형은 북고남저(北高南低)형이다. 성벽 전체를 돌로 축조하였으나 대체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일부 구간에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성벽에서 임존성을 쌓을 때 4가지 축성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장방형으로 가공한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성을 쌓되 성벽의 하부와 상부를 비슷한 크기의 성돌로 축조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일정하지 않은 크기의 할석과 자연석으로 성벽을 축조하고, 성돌 사이의 틈을 작은 쐐기돌 같은 것으로 채워 넣은 방식이다. 네 번째는 성벽 하단부에 큰 성돌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성돌로 쌓는 방식이다. 서로 다른 축성법 4가지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볼 때, 예산 임존성은 초축 후 적어도 세 차례 이상 수축(修築)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곽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성문, 건물지, 우물터 등이 있다. 문지는 북문지와 남문지가 남아 있고, 건물지는 성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물터는 모두 세 지역에서 발견된다.
예산 임존성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 중 한 곳이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 이 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산봉(山峰)에 자리하고 있고 성벽의 둘레도 다른 성들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따라서 백제부흥운동 시기에 등장하는 임존성과 현재의 예산 임존성이 다른 유적이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