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두율성(豆率城) · 주모성(州柔城)이라고도 한다.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근거지였다.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이 이곳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2차연합군을 맞아 최후 결전을 전개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와『당서(唐書)』에는 ‘주류성(周留城)’으로 되어 있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두량이(豆良伊)’로, 그리고『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쓰누〔州柔〕’로 되어 있다.
660년에 신라 ·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부여)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백제의 저항운동은 그 초기에는 임존성(任存城)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등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고 백제부흥운동을 펼쳐나갔다.
661년에 복신과 도침 등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백제부흥군의 본군(本軍)도 주류성으로 옮겨와 사비성의 당군(唐軍)을 계속 압박하였다. 이 때 신라군이 구원차 왔으나 부흥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6월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했을 때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게 됨에 따라 백제부흥군은 세력을 확대 ·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에 지금의 대전 · 금산 방면을 수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662년 5월에는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풍(豊)을 데려와 백제 왕위를 회복하여 더욱 기세가 높아졌다.
그러나 지휘자 사이의 불화로 말미암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부흥군은 내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여러 성들을 빼앗기고 사비성의 포위도 깨어지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백제부흥군은 662년 12월에 왕성(王城)을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일시 옮겼으나 주변의 성들이 함락되자 같은 달에 다시 주류성으로 본진을 옮겼다. 잇따른 패전 속에서 다시 663년 6월에 풍왕(豊王)이 복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부흥군은 더욱 세력을 잃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당군은 응원군인 손인사(孫仁師)의 군사 7,000명이 증원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나뉘어 웅진(熊津)을 출발하여 백강(白江)에서 만나 수륙군이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663년 8월 13일에 주류성에 도달하여, 8월 17일에 주류성을 에워싸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여 8월 28일에는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가 치러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수군 2만이 패배하고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급기야 9월 7일에는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주류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자 풍왕의 숙부인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倭)의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국(耽羅國)의 사자와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그 뒤, 주류성에서 일부 백제부흥군이 저항하였으나 곧 평정되어 4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주류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아직도 정설이 없다. 하지만 신라군과 당군이 논공행상을 했던 설리정(舌利停)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설리정은 현재의 서천군(舒川郡)이다.『삼국사기』권6 신라본기 6에서 신라군은 임존성을 2주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킨다. 이때 신라군이 군사를 돌이킨 이유는 설리정에서 논공행상을 하면서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설리정 진영에 머물러 있었던 당군에게도 의복을 지어 나누어주었다. 임존성과 가까운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가지 않고 사기를 진작시키러 멀리 떨어진 설리정으로 간 것은 이곳이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신라는 주류성을 함락시킨 뒤 설리정을 설치하여 당군을 머물게 했고, 백제부흥군의 왕성에서 논공행상을 하며 저하된 사기를 진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주류성이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현재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통설 이외에도 주류성이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과,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산성(位金山城)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