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설악산으로 가서 경헌(敬軒)에게 출가하였다. 1606년(선조 39) 두류산(頭流山)에서 부휴계의 조사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선수는 수제자 벽암 각성(1575∼1660)에게 '후일에 우리의 도를 크게 할 것이니 그를 잘 가르치라'고 당부하였다. 수초는 각성의 법을 잇고 여러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배웠다. 그는 당대의 명유(名儒)이자 고위 관료였던 김육(金堉) · 이식(李植) · 이안눌(李安訥) · 장유(張維) 등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1629년(인조 7) 수초는 옥천 영축사(靈鷲寺)에서 개당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632년에 그는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의 초청을 받아 석왕사로 갔다. 이러한 인연으로 1644년에 수초의 스승 벽암 각성이 석왕사를 중창(重創)했다. 또한 18세기 전반에는 부휴계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가 석왕사에서 강석을 열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초는 관북 · 관서 지방을 유력하였고, 영남과 호남에서도 교화를 펼치는 등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어느 날 수초가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읽다가 “모든 문자 언어가 이미 다 좁쌀알처럼 되었으니 거기에 또 무슨 맛이 남아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선문염송』은 고려 말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이 선종의 공안(公案)과 법어(法語), 게송(偈頌) 등을 모아 펴낸 책으로 조선 후기 승려의 교육 과정인 이력 과정의 최고 단계 대교과에 들어있는 책이었다.
1668년 1월 수초는 주변 사람들에게 북쪽으로 간다고 말하고 2월에 함흥의 오봉산(五峯山) 삼장사(三藏寺)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6월 그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염불하다가 서쪽을 향해 앉은 채 입적하였다. 삼장사와 안변 석왕사(釋王寺),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그의 탑이 세워졌다.
그의 제자로 백암 성총(1631∼1700)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 해활(海闊) · 민기(敏機) 등이 있다.
수초의 저서로는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1권이 있다. 수초는 화엄(華嚴)의 원융무애(圓融無碍)를 기반으로 선교일치(禪敎一致)라는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중시하여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을 회통(會通)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