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김씨(金氏). 자는 신수(愼守). 호는 백곡(白谷). 12세에 의현(義賢)에게 글을 배우다가 불경을 읽고 그 깊은 이치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고, 15세에 승려가 된 뒤 다시 신익성(申翊聖)으로부터 경사(經史) 및 제자(諸子)와 시문(詩文)을 배웠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각성(覺性)을 찾아가 23년 동안 수선(修禪)과 내전(內典)을 익혀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1674년(현종 15)김좌명(金佐明)의 주청으로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속리산·청룡산(靑龍山)·성주산(聖住山)·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山林法會)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은 대둔사(大芚寺)의 안심암(安心庵)이었다. 한편, 현종의 척불정책에 대하여 전국 승려를 대표하여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렸고, 1680년 금산사(金山寺)에서 대법회를 열고 그 해 7월에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한참 위축되어 있던 조선시대의 승단을 대변하여 호불간쟁(護佛諫諍)에 앞장섰던 고승이다.
「간폐석교소」를 통하여 불교를 논박하는 근거가 승단의 재력과 인력의 소모를 내세울 뿐, 이론적인 타당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점을 논파하였다. 특히 중국의 대유(大儒)들이 오히려 불교이론을 깊이 통달한 점을 열거하여 폐불의 부당성을 항변하였다.
더 나아가서 유교적 요소로서 불교를 이해하려는 원융적(圓融的) 태도를 보여, 유교의 성명설(性命說)·인의설(仁義說)을 그대로 불법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역대의 승가에서 보기 드문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저술로는 『백곡집』 2권과 『임성당대사행장(任性堂大師行狀)』 1권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