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어원은 범어 upavasatha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번역하여 재라 하게 된 것이다. 어원상으로 볼 때 재의 의미는 승려의 식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전용되어 승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의식, 또는 그와 같은 의식을 중심으로 한 법회를 뜻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상사(喪事)가 관련된 의식법회를 칭하는 용어로 전용되었다.
승려에게 공양하는 일은 보시행의 하나로서 불교에서는 이를 크게 장려하였으므로, 식사를 공양하고 행하는 의식인 이 재는 인도에서부터 일찍이 행하여졌다.
중국에서는 양무제(梁武帝) 때 행하여진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비롯하여 많은 재가 설하여졌다. 우리 나라에서 재를 설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비롯된다. 『고려사』에서는 재를 설하였다는 기사 이외에 반승(飯僧)이라는 명칭으로 승려에 대하여 공양을 성대히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재는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특별한 의식이나 격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재를 중심으로 그 전후에 간단한 예불 정도의 의식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예상되나, 재의 본래적인 의미가 전화되어 각종의 의식절차를 수반하게 되었다.
원래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여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쌓는 데 목적이 있었던 재가, 법회 등의 형식을 취하게 되면서 각종 기복적인 목적을 가지는 여러 가지 의식으로 전개되었다.
고려시대의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 등의 호국법회와 그에 따른 반승은 변형된 형태의 재라고 할 수 있으며, 국왕의 탄일이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따른 반승, 그리고 기일(忌日)의 반승 등이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 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는 각기 목적하는 바에 따라 의식의 형태를 달리한다. 이와 같은 재는 본래의 의미가 목적의 전화를 가져와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보다 법회의 의식 자체가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호국법회가 자취를 감추고 민간에 의한 각종 재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륙재(水陸齋) ·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 영산재(靈山齋) 등이다.
조선 전기에는 수륙재가 국행(國行)으로 행하여졌으나 중종 때 유생들의 상소로 폐지된 이후 민간에 의하여 행하여지게 되었다. 수륙재는 유주무주(有主無主)의 여러 고혼(孤魂)을 천도함에 의하여 자신의 복락을 누린다는 목적에서 행하는 재이며, 생전예수재는 살아 생전에 미리 불보살에게 공덕을 쌓아 죽어서 명부시왕의 심판을 거쳐 극락세계에 왕생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재이다.
그리고 영산재는 49재의 한 형태이다. 49재란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명부시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신앙근거에 따라 7일마다 재불공을 올리고, 7·7일, 즉 49일이 되는 날 재공을 올려야만 다음 생을 받을 연(緣)이 정하여진다고 하여 행하는 재이다.
오늘날에 있어 재라 하면 이상의 3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의미가 전화된 재에 있어서도 재의 원래의미인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는 의미는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재의식이 끝나고 난 뒤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하게 됨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