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봉성사 ( )

목차
관련 정보
불교
유적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1대 신문왕 또는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
유적
건립 시기
남북국시대
관련 국가
통일신라
관련 인물
신충(信忠), 혜통(惠通)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봉성사(奉聖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 또는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에서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 그 위상이 높았다. 사찰은 조선 중기까지 존속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1대 신문왕 또는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
창건배경

봉성사(奉聖寺)의 위치는 명나라 영태(永泰) 2년명 납석제(蠟石製) 뚜껑이 출토된 경주시 인왕동 구교육청 일대에 있었다고 추정하거나, 이 납석제 뚜껑에 새겨진 ‘북방 봉성사’라는 명문에 기초하여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절터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찰이 있었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봉성사의 창건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봉성사가 창건된 시기를 685년(신문왕 5)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먼저 신문왕대에 봉성사가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685년(신문왕 5)에 혜통(惠通)의 청으로 왕이 신충(信忠)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신충봉성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혜통은 당나라로 가서 선무외(善無畏)의 비밀법(祕密法)을 전수 받은 뒤 귀국하였다. 그 때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을 청하였는데, 혜통이 가서 주문을 외우자 왕의 병이 즉시 나았다. 이 때 혜통이 신문왕에게 “폐하가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있었을 때 양민 신충을 그릇 판결하여 종으로 삼았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환생(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신충의 재앙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명복을 빌어 원한을 풀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신문왕은 혜통의 말을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지었다고 한다. 절이 완공된 뒤 공중에서 “왕이 절을 지어주어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이 풀렸도다”라는 노랫소리가 들렸기에, 그 노래를 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세웠다고 한다.

봉성사가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는 견해는 신충이 신문왕 이후인 경덕왕대(742~765)에 활동한 상대등 이찬 신충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제시된 설이다. 따라서 사찰의 창건 시기를 경덕왕대로 늦춰서 보거나, 신문왕대에 창건한 후 경덕왕대에 중창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편 봉성사의 명칭이나 절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신충 개인을 위한 사찰로 절을 창건한 것이라기보다는 태종무열왕 또는 김유신을 위한 원찰로 조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변천 및 현황

『삼국사기』 권 제38 잡지 제7 직관(상)에 따르면 봉성사에 성전(成典)을 설치했다고 한다. 따라서 통일신라기에 봉성사는 관사(官寺)의 하나로서 매우 격이 높은 우대를 받았다. 신라 말인 912년(효공왕 12)때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봉성사는 외문(外門)이 21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봉성사에는 신라의 쇠퇴와 패망을 예시하는 징조와 관련해 몇 가지 기록이 전한다. 『안국병법(安國兵法)』에는 밭에 연(蓮)이 나면 큰 병란이 있다고 하였다. 776년(혜공왕 2) 7월 이 절의 밭에서 연이 났는데, 7월 3일에 각간 대공(大恭)이 반란을 일으켰고 장창(長倉)이 불탔다고 한다. 또 912년(신덕왕 1)에 봉성사 바깥문 동서 21칸에 까치가 깃들여 집을 짓고 신라의 패망을 예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봉성사는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사찰의 맥을 이어왔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봉성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당시 이 절과 절원당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이나 이외에 관련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는 “봉성사는 부 동쪽 4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봉성사가 조선 중기까지는 존속하였다가 이후에 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