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은 성덕왕 33년(734) 정월 당 현종에게 성덕왕을 대신하여 표문을 올린 좌령군위 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과 동일 인물이다. 표문에서 김충신이 숙위를 김지렴과 교대하여 귀국하는 내용이나 일시 등이 『문원영화(文苑英華)』와 『전당문(全唐文)』에 등장한 김신충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김충신과 김신충이 별개의 인물처럼 기록된 데는, 『삼국사기』가 위의 표문에 관한 기록을 『책부원귀』의 기사를 전재한 때문이다. 김충신(신충)이 성덕왕 33년(734) 당 현종에게 올린 표문에 따르면, 그는 성덕왕의 종제로서 효성왕과 경덕왕, 김지렴(金志廉)의 종숙이다.
성덕왕 25년(726) 당에 하정사로 파견되어 숙위하여 성덕왕 32년(733) 초가을 당 현종의 칙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는 당 현종의 숙위로 있으면서 좌령군위 원외장군에 보임되었다. 또한, 성덕왕 31년(732) 7월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자 이듬해에 당 현종은 성덕왕을 개부의동삼사 영해군[대]사(開府儀同三司 寧海軍[大]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고자 하였고, 성덕왕 33년(734) 초가을 김신충을 영해군부사에 보임하여, 바닷가에 숨어 있는 발해의 남은 무리를 토벌하게 하였다. 성덕왕 34년(735) 당이 신라에게 패강(대동강) 이남의 땅을 인정한 데는 김신충의 공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충은 효성왕 3년(739) 중시였던 아찬 의충(義忠)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이찬으로서 중시에 임명되었다.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는 신충이 지었다는 「 원가」가 전한다. 곧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충과 함께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뒷날 그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즉위한 효성왕이 공신에게 상을 줄 때 자신을 잊고 등급에 넣지 않자, 신충이 「원가」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자 그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왕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작록(爵祿)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종질인 아찬 의충이 중시에 임명되었음에도, 신충이 효소왕의 종숙이자 이찬의 지위에 있었고, 이미 패강 땅의 회복에 공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정치 사회의 승급 차서에서 밀렸던 당시의 처지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경덕왕 16년(757) 정월에 병으로 면직된 김사인(金思仁)의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되었다. 김사인은 신충과 종형제으로 추정된다. 신충은 상대등에 보임된 3월에 경덕왕을 보좌하여 내외 관료들의 월봉(月俸)을 혁파하여 녹읍을 부활시키고, 9주를 비롯한 지방군현의 명칭을 모두 한식(漢式)으로 고쳤다. 경덕왕 18년(759)에는 중앙관부의 명칭까지도 한식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한화정책(漢化政策)은 당의 제도에 맞추어 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상대등이었던 신충이 경덕왕 대의 한화정책의 중심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경덕왕 22년(763) 상대등에서 물러났는데,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는 남악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왕의 진영을 금당 뒷벽에 걸어 놓고 왕의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단속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22년(763)조에는 대나마 이순(李純)이 은거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왕을 위해 풍악을 멀리하라는 간언을 하여 왕이 깨우쳤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으로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는 경덕왕 대에 직장(直長) 이준(李俊) 또는 이순(李純)이 출가하여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단속사를 세워 머물렀다는 연기를 전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조에는 신문왕이 등창이 나자 왕이 재상이었을 때 장인(臧人) 신충(信忠)을 잘못 판결한 때문이라 하여,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이 지적하듯이, 신문왕 대와 경덕왕 대가 100여 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문왕 대와 경덕왕 대의 신충은 동명이인임에 분명하다. 다만, 신충봉성사에 대해서는 「황복사비」 비편에 "봉성신충사([奉]聖神忠寺)의 장관(令) 이찬(伊[飡])"의 비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봉성사의 전신이 ‘신충봉성사’가 아니라 ‘봉성신충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 혜통항룡조의 ‘신충봉성사’란 명칭은 전승 과정에서 와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단속사의 창건은 진골 귀족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순이 경덕왕에 대한 원망과 연정의 마음으로 경덕왕 7년(748) 단속사를 경영하게 되었고, 「원가」는 한때 왕의 총애를 받던 그가 단속사에 은거해 실의의 만년을 보내면서 세태의 변화를 원망한 노래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신충의 정치적 입장 또한 이순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신충은 비교적 늦게 신라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서 지칭하였듯이, 그가 왕을 위해 단속사에 은거하여 왕의 진영을 금당 뒷벽에 걸어 놓고 왕의 복을 기원하였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