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19년(532) 금관국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는데, 세종도 아버지 구해왕을 따라서 항복하였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라 하였는데, 『 삼국사기』 법흥왕조에는 노종(奴宗)이라 하였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 구해왕)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분질수(分叱水) 이질(尒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진흥왕 12년(551) 이전에 건립된 「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의 대중등(大衆等)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대아찬),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의 내부지(內夫智) 일척간(一尺干: 이찬), 「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와 「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 巡狩碑)」의 대등(大等) 내부지 이간(伊干)은 동일 인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진흥왕 12년(551) 거칠부와 함께 8장군의 1인이었던 노부(奴夫) 파진찬(波珍飡)이나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노리부(弩里夫), 진평왕 7년(585) 대궁(大宮) · 양궁(梁宮) · 사량궁(沙梁宮)에 사신(私臣)을 설치하면서 양궁 사신으로 임명된 노지(弩知) 이찬 또한 노종(세종)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종의 ‘노’ 또는 ‘노리’, ‘노례’는 음독이고, 세종의 ‘세’는 훈독이며, ‘종(宗)’은 존칭으로서 ‘부’ 또는 ‘부지’, ‘지’의 훈독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금관국 김구해의 항복 이후로 아우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과 함께 신라의 장군,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진흥왕이 동왕 12년(551) 이전 어느 때인가 적성을 순수(巡狩)할 때에 대아찬으로서 대중등의 지위에 올라 국왕을 수가하였고, 진흥왕 12년(551) 왕명을 받아 거칠부와 함께 8장군의 1인으로서 고구려를 백제와 함께 공격하면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아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진흥왕 29년(568)에 진흥왕이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 등을 순수할 때에 이찬이자 대등으로서 수가하였다.
진지왕 2년(577) 10월에 이찬으로서 일선군(一善郡: 경북 구미시 선산읍) 등 서쪽 변경을 침략한 백제군을 쳐서 베고 포로로 잡은 수가 3,700명에 이르는 전과를 올렸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이찬 세종(노종)이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쳤다는 동일한 기사가 있는데, 일선군에서의 승리 직후 신라가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았다는 기사가 있어 세종(노종)이 동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성을 쌓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진평왕 원년(579) 8월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고, 진평왕 7년(585)에는 양궁(梁宮) 사신(私臣)을 겸직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진평왕 10년(588) 12월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