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삼국시대 금관국의 후예로서 신라 중고기에 활약한 장군, 관료.
가계 및 인적 사항
진흥왕 12년(551) 이전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의 대중등(大衆等)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대아찬),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의 내부지(內夫智) 일척간(一尺干: 이찬),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 巡狩碑)」의 대등(大等) 내부지 이간(伊干)은 동일 인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진흥왕 12년(551) 거칠부와 함께 8장군의 1인이었던 노부(奴夫) 파진찬(波珍飡)이나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노리부(弩里夫), 진평왕 7년(585) 대궁(大宮) · 양궁(梁宮) · 사량궁(沙梁宮)에 사신(私臣)을 설치하면서 양궁 사신으로 임명된 노지(弩知) 이찬 또한 노종(세종)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종의 ‘노’ 또는 ‘노리’, ‘노례’는 음독이고, 세종의 ‘세’는 훈독이며, ‘종(宗)’은 존칭으로서 ‘부’ 또는 ‘부지’, ‘지’의 훈독이기 때문이다.
주요 활동
진지왕 2년(577) 10월에 이찬으로서 일선군(一善郡: 경북 구미시 선산읍) 등 서쪽 변경을 침략한 백제군을 쳐서 베고 포로로 잡은 수가 3,700명에 이르는 전과를 올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이찬 세종(노종)이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쳤다는 동일한 기사가 있는데, 일선군에서의 승리 직후 신라가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았다는 기사가 있어 세종(노종)이 동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성을 쌓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진평왕 원년(579) 8월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고, 진평왕 7년(585)에는 양궁(梁宮) 사신(私臣)을 겸직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진평왕 10년(588) 12월에 죽었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 박남수,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주류성, 2013)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 김덕원, 『신라중고정치사연구』(경인문화사, 2007)
-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푸른역사, 2002)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Ⅰ(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논문
- 김태식,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震檀學報』 81, 1996)
- 姜鳳龍,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4)
- 박남수, 「신라화백회의의 기능과 성격」, 『한국사학논총』 상(수촌 박영석교수 화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2)
- 이기백, 「단양적성비 발견의 의의와 왕교사부분의 검토」, 『사학지』 12, 197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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