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내성 산하의 궁중 수공업 관사로서 말고들개를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직관지(중)에 그 명칭만이 전한다. 이들 궁중 수공업 관사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문무왕 대부터 혜공왕 대에 이르는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먼저 681년(신문왕 1년)에 본피궁을 내성 산하 관사로 설치하면서 중고기부터 있었던 궁중 수공업 관사를 본피궁을 수반으로 일련의 체계를 갖추었다. 다시 759년(경덕왕 18)에 관호를 개혁할 때에 해당 관사의 직능에 따라 기구를 조정하였다. 이는 중국과의 교역품을 효과적으로 조달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수공업 기술상의 변화 때문이었다. 곧 경덕왕이 관호를 개혁하기 전에는 원료의 종류에 따라 운영하였으나, 경덕왕이 관호를 개혁한 후에는 일련의 생산 공정에 따라 분업화되었다.
다만 가죽 제품을 생산하는 관사의 경우 피전(皮典)과 피타전(皮打典)만이 관호 개혁 이전에 있었고 그 이후에 제품별로 다시 구분, 정비되었다. 곧 피전과 피타전에서 가죽을 다루고 무두질하여 각 제품의 생산을 위하여 각각의 생산 관사에 보낸다. 그러면 피타전에서는 북류[鼓類]를, 탑전과 화전(靴典)에서는 가죽 신발과 가죽 장화를, 추전에서는 말고들개를 제작하였다.
이처럼 생산 공정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었던 추전을 비롯한 가죽 생산 관사는 고려시대에 칠전(漆典)이나 석전(席典) · 궤개전(机槪典) · 양전(楊典) · 와기전(瓦器典)과 함께 관영 수공업 관사인 중상서(中尙署)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