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노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관련 사건
조천성 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노는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이다. 대체로 선덕여왕~진덕여왕 대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문노의 화랑도에는 수많은 낭도가 있었는데, 655년(무열왕 2) 양산 조천성 전투에서 전사한 낭당 대감 김흠운과 동문승 전밀 등 많은 무리가 있다.

목차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
주요 활동

문노(文努)의 이력은 분명하지 않지만, 655년(무열왕 2) 양산 조천성(助川城) 전투에서 전사한 낭당(郎幢) 대감(大監) 김흠운(金欽運)이 그의 낭도였다는 『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서만 등장한다.

김흠운이 무열왕의 사위로서 전사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문노가 화랑으로서 김흠운을 낭도(郎徒)로 거느렸던 때는 대체로 선덕여왕~ 진덕여왕 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다만, 김흠운이 그의 화랑도에서 노닐면서 전사한 화랑도의 무훈담을 듣고 감격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의 동문승(同門僧)으로 전밀(轉密)이 있었다는 일화에서 당시 화랑도의 구성 등을 살필 수 있다.

곧 문노의 화랑도에는 수많은 낭도가 있었고, 그 가운데 승려 낭도로서 전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승려 낭도는 낭도들을 운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낭도들에게 전사한 화랑도들의 무훈담 등을 가악의 형태로 충의를 가르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 사론에서, 많은 무리가 운집하여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하며, 산수를 즐기며 멀리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김흠운은 화랑도로서 배웠던 충의를 조천성 아래 양산 전투에서 실천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또한 『 속동문선』에 전하는 「 양산가(陽山歌)」에서 "씩씩할 손 화랑도 나라 위해 몸을 바쳐 딴 생각 없었네. … 슬프다, 네 장부여 … 천추의 귀웅(鬼雄)이 되어서 함께 제삿술을 마시는구나."라고 읊었듯이, 김흠운과 함께 전사한 대감(大監) 예파(穢破)소감(少監) 적득(狄得), 보기(步騎) 당주(幢主) 보용나(寶用那) 등도 문노 문하에서 노닐던 동문 낭도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동문선(東文選)』
『동사강목(東史綱目)』
『삼국사기(三國史記)』
『속동문선(續東文選)』

단행본

박남수,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주류성, 2013)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 상(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이기동,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일조각, 1984)

논문

이상훈, 「삼국통일기 화랑정신과 김유신의 리더십」(『국학연구론총』 17, 택민국학연구원, 2016)
최광식, 「新羅 花郞徒와 風流道」(『史叢』 87,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6)
金煐泰, 「僧侶郞徒攷」(『佛敎學報』 7,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69)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