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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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관련 순수비. 북한문화재.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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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비(磨雲嶺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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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관련 순수비. 북한문화재.
개설

본래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운시산(雲施山, 속칭 萬德山) 봉우리 아래에 있었다. 지금은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위치한 함흥 본궁(本宮) 본관(本館)에 보관되어 있다. 일찍부터 학자들이 주목해 한백겸(韓百謙)·김정희(金正喜) 등이 언급했으나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고, 다만 현지에 살던 강필동(姜必東)이 약간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29년 9월에 전적(典籍)조사 일로 현지에 출장나가 있던 최남선(崔南善)이 현지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해 학계에 소개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165㎝, 너비 65㎝, 두께 약 30㎝이며, 앞면에는 10행에 행마다 26자, 뒷면에는 8행에 행마다 25자가 각기 새겨져 있다. 마멸이 비교적 심하지 않아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

내용

이 순수비는 568년(진흥왕 29)에 세워졌는데, 이로써 진흥왕 때의 신라의 동북 국경선은「황초령비(黃草嶺碑)」가 있는 함흥에서 더 멀리 동북쪽까지 진출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초령비에서 판독할 수 없었던 많은 글자들을 새롭게 복원할 수 있었다.

구성은 제기(題記)·기사(紀事)·수가인명(隨駕人名)으로 되어 있다. 태창(太昌) 원년(568) 진흥왕이 순수했을 때 세웠으며,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善政)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그리고 진흥왕을 따라 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내용과 수가인명이「황초령비」과 비슷하지만「마운령비」가 결자가 적어「황초령비」의 결락부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문에서 진흥왕이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새로 편입된 지역이든 오래 전부터 영토로 관리하던 곳이든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민(民)·백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도 나라를 위하여 충절을 다하여 공(功)이 있는 자들이 있으면 상작(賞爵)을 더할 것(可加)임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작(爵)은 신라의 관등 그 중에서도 외위(外位)를 의미한다. 더할 것이라는 말에서 진흥왕이 현지에 행차하기 이전에 이미 그곳 지방민들은 외위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운령비」에는 다른 순수비에는 보이지 않는 사문도인(沙門道人)·집가인(執駕人)·이내종인(裏內從人)·유인(卣人)·약사(藥師)·내부통전(奈夫通典)·급벌참전(及伐斬典)·당래객(堂來客)·이내객(裏內客)·외객(外客)·조인(助人) 등 많은 관직 이름이 보이고 있어 신라의 정치제도, 특히 국왕의 종자제도(從者制度)를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금석문 자료가 된다.

사문도인은 승려로 간주되는데, 이들은 국정의 자문역 뿐만 아니라 전략가의 임무도 수행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아울러 이들은 정복지역에 대한 순무(巡撫)의 역할도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가승려들은 불교의 지방확산에도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집가인은 국왕의 가마와 수레를 관장하는 직책이며, 이내종인은 국왕의 처소에서 왕과 왕족을 시중하고 여러 종류의 궁중업무에 종사하던 근시직으로 보인다.

유인(卣人)에서 유(卣)는 제기(祭器)로 쓰여진 줄이 달려 잇는 주호(酒壺)을 가리키는데, 유인은 제사나 점복(占卜)과 관련한 일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는 어의(御醫)로 보이며, 내부통전의 임무는 잘 알 수 없으나 순행(巡幸) 및 제의(祭儀)를 인도하는 관직으로 보인다. 급벌참전은 왕의 순수 시 태만하였거나 잘못을 저질렀던 지방관·촌주(村主)·수가신료들의 잘못을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내(裏內)는 고구려의 중리(中裏), 고대 일본의 내리(內裏)와 같은 뜻으로 ‘왕궁 내부’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내종인은 국왕이 거처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寢殿)이나 또는 국왕의 집무실을 가리키는 편전(便殿) 등에서 국왕을 시종하던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 모두루묘지에서 ‘객(客)’이 국왕의 신료나 관원을 지칭하는 용례로 사용되었음을 고려하건대, 이내각은 침전이나 편전에서 국왕을 보좌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을, 당래객은 국왕이 신료들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 또는 남당(南堂)에 소속된 관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추정된다. 외객은 지방통치와 관련된 업무를 보던 하급관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확실치 않다.

한편, 거칠부(居柒夫)·복동지(服冬知)·비지부(比知夫) 등 고관의 이름도 보여 인물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또, 태창이라는 연호의 사용, 6부명, 관직과 관등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사 및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문도인’이나『논어』·『서경』등에서 인용한 구절 등은 진흥왕대 불교와 유교사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신라진흥왕순수비연구(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노용필, 일조각(一潮閣), 1996)
『역주 한국고대금석문(譯註 韓國古代金石文)』2(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6~8세기 신라 왕궁의 구조와 정무·의례 공간의 분화」(여호규, 『역사와 현실』94, 2014)
「마운령 진흥왕순수비의 근시수가인에 대한 검토」(이도학, 『신라문화』9, 1992)
『북한문화재실태(北韓文化財實態)와 현황(現況)』(문화재관리국, 1985)
「신라 중고의 국왕근시집단」(이문기, 『역사교육론집』5, 1983)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의 발견경위(發見經緯)에 관한 일관견(一管見)」(강철종, 『전북사학(全北史學)』3, 1979)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이난영, 중앙대학교출판부, 1969)
「眞興碑について」(前間恭作, 『東洋學報』19-2, 1931)
「新羅眞興王の在來三碑と新出現の摩雲嶺碑」(崔南善, 『靑丘學叢』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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