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년에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는 '비자벌정조인(比子伐停助人)'으로,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는 그냥 ‘조인(助人)’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마운령비에 '비지사간조인사탁부순지나말(非智沙干助人沙喙部舜知奈末)'이라고 한 부분에서, 비록 비문의 마멸로 인해 보이지는 않지만, 561년 당시에는 조인 앞에 비지사간(非智沙干)의 직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녕비에 당시 이 지역에 편성된 6정 군단 가운데 하나인 하주정(下州停)의 소재인 '비자벌정조인(比子伐停助人)'이 기재된 점으로 보아, 마운령비에 기재된 비지사간의 직명은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이거나 비열홀군주(比烈忽軍主)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석문에서는 같은 직명이나 지명을 나란히 기재할 경우, 처음 나오는 인물에만 모두 기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는 생략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마운령비에 기재된 ‘조인사탁부순지나말’ 역시 비열홀정 조인이었다고 판단된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수가인(隨駕人)이 같으므로 황초령비 마지막 부분의 ‘조인사탁부윤지나말’ 역시 '조인사탁부순지나말'과 동일인이다. 단지 두 비문의 글자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비문의 마멸 혹은 탁본상의 결함 때문이다.
이에 두 비문의 글자가 같고 마운령비가 보다 선명하다는 점에서 창녕비·마운령비·황초령비에 보이는 '조인(助人)'은 모두 6정 군단의 주둔지에 배치된 관직의 직명임을 알 수 있다.
6정에는 주(州)의 장관이며, 군단장인 군주(軍主)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은 군주를 보좌하는 관직으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 외관조에 보이는 '주조(州助)'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