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년에 세운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 나오는 관직명이다. 당시 신라는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해 오늘날 함경남도 이원군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몸소 이 지역을 순수하고 이를 기념해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진흥왕을 모시고 이 곳까지 온 사문도인(沙門道人), 대등(大等), 집가인(執駕人), 이내종인(裏內從人), 유인, 약사(藥師) 등 수가인명(隨駕人名)이 기재되어 있다.
유인에 대해서는 후세의 왕실복사(王室卜師)와 같은 성격으로 내성(內省) 예하 공봉복사(供俸卜師)의 전신(前身)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卣’자 자체는 ‘술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유인은 ‘술통을 나르는 사람’이라 풀이된다.
유인은 국왕이 먼길을 행차할 때 술통을 가지고 시종(侍從)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유인은 후대 내성 관하의 춘전(春典)의 관원인 사지(舍知)나 사(史)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또한, 이것은 당나라 궁관(宮官) 가운데 상식(尙食) 아래의 사온(司醞)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