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 영락 5년(395)조에 보이는 길 이름이다. 요양(遼陽)을 한나라 때에 양평이라 불렀다. 따라서 양평도는 요양에서 고구려에 이르는 길이다. 당시 국내성(國內城)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북도로서 북으로 노령산 입구에서 서쪽으로 환인을 가로질러 가는 것으로 이 길은 지세가 평탄하여 왕래가 비교적 용이한 곳이다. 또 하나는 남도로써 순판분령을 따라 남하하여 패왕조산성을 거쳐 환인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산길로 험하여 넘기 힘들다.
두 길은 모두 환인을 거친 이후 다시 남북으로 갈린다. 북도는 현재의 무순에 이르게 되며 남도는 현재의 요양에 이르게 된다. 북도를 현도도라 하며 수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 올 때 좌군(左軍)의 진군로였다. 양평은 오늘날의 요양이다.
따라서 양평도란 남도를 가르키는 말이며, 수양제가 고구려를 쳐들어 올 때 우군(右軍)이 이 길로 진군했다. 광개토왕과 비려(碑麗)의 싸움은 태자하(太子河) 상류에서 벌어졌고 이곳은 바로 두 길의 중간지점으로 양평도에서 몇 십리 밖에 안 된다.
양평도는 비교적 평탄하여 전쟁 후 호태왕과 군대는 그 많은 생구(生口)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우마군양을 데리고 이 길로 귀환하였다.
환인에 이른 후에도 같은 이유 때문에 반드시 북도를 통과했다. 그 많은 소와 양을 끌고 우마가 넘기 힘든 준령, 즉 남도를 광개토왕의 군대는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