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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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고대사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신라 진흥왕 관련 순수비.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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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신라 진흥왕 관련 순수비.
내용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 북한산(일명 三角山)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561년(진흥왕 22)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진흥왕 29)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비는 윗부분이 일부 마멸되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은 높이가 154㎝, 너비가 69㎝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며 행마다 해서체로 32자가 새겨져 있다.

진흥왕은 553년(진흥왕 14)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 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진흥왕 16)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일척간(一尺干: 伊飡의 별칭)의 고위관등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의 인물 및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진흥왕순수비

참고문헌

『신라진흥왕순수비연구』(노용필, 일조각, 1996)
『한국금석문추보』(이난영, 중앙대학교출판부, 1969)
「진흥대왕의 위업」(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진흥왕비의 수가신명연구」(강만길, 『사총』 1, 1955)
「진흥이비고」(김정희, 『완당선생전집』 1, 1934)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今西龍, 『考古學雜誌』 12·13, 1921 ; 『新羅史硏究』,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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