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신라 진흥왕 관련 순수비.
내용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561년(진흥왕 22)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진흥왕 29)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비는 윗부분이 일부 마멸되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은 높이가 154㎝, 너비가 69㎝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며 행마다 해서체로 32자가 새겨져 있다.
진흥왕은 553년(진흥왕 14)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 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진흥왕 16)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일척간(一尺干: 伊飡의 별칭)의 고위관등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의 인물 및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진흥왕순수비
참고문헌
- 『신라진흥왕순수비연구』(노용필, 일조각, 1996)
- 『한국금석문추보』(이난영, 중앙대학교출판부, 1969)
- 「진흥대왕의 위업」(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 「진흥왕비의 수가신명연구」(강만길, 『사총』 1, 1955)
- 「진흥이비고」(김정희, 『완당선생전집』 1, 1934)
-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今西龍, 『考古學雜誌』 12·13, 1921 ; 『新羅史硏究』,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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