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부(弩里夫)의 가계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법흥왕 19년(532)조에서 신라에 항복한 금관국 구해왕(仇亥王)의 맏아들로 전한 '노종(奴宗)'과 권 44 ‘거칠부 열전'에 보이는 ' 노부(奴夫)’ 파진찬을 노리부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구해왕의 아들 노종은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가락국기'에서는 '세종(世宗)'으로도 나오는데, '세(世)'의 훈(訓)이 '누리'여서 노리부라는 이름의 앞부분을 음차할 경우 노종, 훈차할 경우 세종으로 표기되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사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적지 않았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세종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지왕 2년(577) 10월조에도 보이는데, 같은 책 같은 권에서 노리부가 따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양자는 서로 다른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보이는 '내례부지(內禮夫智)'와 '서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 나오는 '내부지(內夫智)'를 노리부로 추정하기도 한다.
노리부라는 이름으로 관련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만 한정하여 보면, 진평왕 즉위년인 579년 8월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9년 뒤인 진평왕 10년(588) 12월에 상대등으로 지내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1 '기이편 도화녀 비형랑조'에 따르면, 진평왕은 앞선 왕인 진지왕이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국인(國人)들에 의해 폐위된 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오는데, 즉위하자마자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그가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 옹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