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편찬된 문헌 사료 가운데 『 삼국사기』에는 단지 두 글자로만 된 '양부(梁部)'로 나오는데, 『 삼국유사』에서는 앞에 ‘급(及)’ 자를 붙여 '급량부(及梁部)'라고 소개하였다. 신라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 자료에서는 '喙部'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되었으며, 그 발음을 둘러싸고 ‘탁부’, ‘닭부’, ‘훼부’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급량부에 대해서는 '급(及)'을 바탕, 근저(根底)를 의미하는 우리말 '밑'의 차자(借字)라고 이해하면서 'O량부'라는 이름을 띤 다른 부들의 뿌리를 이룬 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신라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 자료에서 양부를 뜻하는 ‘喙部’ 앞에 '급(及)'이나 그와 음이 유사한 다른 글자가 붙은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감안할 때, 『삼국유사』에만 확인되는 '급량부'라는 표기는 전록(轉錄)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애초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참고한 자료에 '무슨무슨 부와 양부'라는 의미로서 'OO부급량부(部及梁部)'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는데, 영어의 'and'의 뜻을 지닌 '及'이 마치 부명의 첫 글자인 것으로 잘못 읽으면서 '급량부'라는 부명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한편 '양부(梁部)'는 고려시대의 자료에 등장하는 용례이고, 신라 당대에는 '喙部'라는 다른 글자가 주로 쓰였다. 이 '喙'의 음과 관련하여 어려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喙'의 음은 '훼'이며, 새의 '부리'라는 뜻을 지닌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말에서 벌판을 지칭하는 '벌'이나 그 고대어로서 ‘불’, ‘부리’ 등을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 본다(훼부설).
그런데 『삼국유사』 권 1 기이편 진한조에는 중국의 '탁수(涿水)'라는 강의 이름을 따서 '사탁(沙涿)', ‘점탁(漸涿)’ 등으로 읍리(邑里)를 불렀다는 최치원의 언급이 인용되어 있고, 『양서(梁書)』 등의 중국 측 사서에도 신라에는 6개의 ' 탁평(啄評)'과 52개의 읍륵(邑勒)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를 인용하여 '喙'의 음을 '탁'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탁부설).
하지만, 『삼국유사』의 진한조 말미에 붙은 협주에서 "신라인들은 '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발음했으니, 지금도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양(梁)'을 '도(道)'라고 읽는다."라고 밝히고 있어, 실제로 ‘양(梁)’ 또는 그 본글자로서의 '喙'의 음이 '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양(梁)'은 명량(鳴梁)을 우리말로는 '울돌'로 읽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돌'의 음에 가까울 수도 있고,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장산군(獐山郡)조에서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있었던 '압량소국(押梁小國)'을 '압독소국(押督小國)'이라고도 했다고 전하는 데서 보는 것처럼 '독'으로도 발음될 수 있는 말이었다.
특히 고려 때 송(宋)나라의 사신단 일원으로 고려를 찾아왔던 손목(孫穆)이 남긴 『 계림유사(雞林類事)』라는 책에는 "닭[雞]을 '喙'이라고 적는데, 음은 '달(達)'이다."라고 나와, '喙'의 본뜻이 닭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喙部'나 그 변형으로서의 '양부(梁部)'는 '닭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닭부설).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는 32년 봄에 과거 '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후신이었던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로 개명하고 '이(李)'씨 성을 내려주었다고 되어 있다. 즉 양부는 혁거세 등장 이전부터 경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6촌의 하나로서 알천양산촌이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에 '양부'라는 이름이 생겼고 부의 성으로서 이씨가 내려졌다고 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6세기에 작성된 신라 금석문들에 '양부'에 해당하는 '喙部(탁부, 닭부, 훼부)'가 '沙喙部'와 함께 ‘김씨’ 왕실의 소속부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울러 두 부의 출현 시점은 김씨 족단이 경주 지역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탈해이사금 시기 이후가 되므로, 탈해보다 앞선 유리이사금 시기에 이미 양부나 사량부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양부와 사량부가 주축이 되어 6부가 갖추어진 것은 이사금 시기로 보는 설도 있고, 마립간 시기인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대로 보는 설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신라 초기의 6촌이 6부로 곧장 이어졌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양부는 6부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부로 6세기 전반까지 6부 체제를 주도한 정치체였다.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는 당시 왕이었던 법흥왕이 ‘喙部’ 소속의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으로 등장한다. 왕을 비롯한 김씨 왕실의 주요 구성원들이 양부 소속임을 밝힌 것인데, 한편으로 이때까지도 신라왕은 6부와 그를 바탕으로 한 6부 체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부 체제는 얼마 뒤 불교 공인 과정에서 왕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마침내 극복되었다. 그러나 양부를 포함한 6부는 지배층의 출신을 표시하는 기능을 하면서 한동안 유지되었고,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기에 들어가서는 정치체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한 채 단순히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