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륵(邑勒)은 촌(村)·읍(邑)을 의미하는 신라어인 벌(伐)·불〔火·弗〕에 대신하는 호칭이다. 우리나라 사서에는 보이지 않고『양서(梁書)』신라전(新羅傳)에만 나타난다.『양서』에 의하면, 6세기 전반에 신라에는 중앙에 6탁평(啄評)이 있었고, 지방에는 중국의 군(郡)·현(縣)에 해당하는 52읍륵이 있었다고 한다.
52읍륵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첫째, 읍륵은 통일기(統一期) 신라의 ‘군’으로 보는 견해이다. 52읍륵은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국(國)’을 의미했지만 통일기 신라에서는 ‘군’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지방제 형성 초기인 법흥왕(法興王)대에 설치된 군의 수가 52개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일 후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원신라와 가야(加耶) 영역에 해당하는 상주(尙州)·양주(良州)·강주(康州)의 2개 주에 설치된 군의 수는 겨우 33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읍륵을 곧바로 군으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두 번째, 읍륵은 6세기 당시에는 성(城)·촌을 의미했으며, 통일기를 맞아 대개 52개의 군현이 된다는 설이다.『양서』의 기사는 521년을 전후한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 신라는 아직 서해안에 도달하지 못하고 겨우 지금의 경상북도를 다스리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 좁은 지역에 52개의 군을 설정할 수 없다. 통일기가 되면 이 지역에 50개 정도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읍륵이 통일기의 군이나 현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 조금 더 나아가 읍륵을 지방의 중요거점으로 도사(道使)가 파견된 행정(성)촌(行政(城)村)으로 보기도 한다. 6세기 초반 도사는 특정 행정(성)촌에 파견되었지만 그 인근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광범위한 지역까지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도사가 파견된 행정(성)촌이 『양서』에서 말한 중국의 군·현적인 성격을 동시에 포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삼국사기』지리지에서 외여갑당주(外餘甲幢主)로 불리는 법당주(法幢主)에 의해 통솔되는 법당군단(法幢軍團)의 소재지로 보는 견해이다. 외여갑당주의 수가 52명으로 52읍륵과 일치하므로 읍락은 법당군단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군사거점이었으며, 읍륵에는 각기 법당군관(法幢軍官)이 파견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견해는 6탁평을 군사적인 성격을 띠는 왕경(王京) 부근의 6기정(六畿停)으로 보는 설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6탁평을 6기정으로 본 것은 6세기 초에는 아직 6부(六部)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6부의 단계적인 성립설에 근거한 것이지만 「영일냉수리비(迎日冷水里碑)」와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의 발견으로 6부의 성립은 그 이전으로 소급함이 확실시되었으므로 이 6탁평도 6부로 보아야 마땅하다. 또 6탁평이 군사적인 성격을 띤 6기정이 아니라 6부라면 그에 대응되는 지방의 읍륵도 굳이 군사적인 성격의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