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초기에 경주 지역에 자리 잡았던 6개의 촌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48년조에 ' 고허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탑상편 천룡사(天龍寺)조에는 남산 남쪽 '고위산(高位山)'의 양지바른 곳에 천룡사가 있다고 나온다.
현재 천룡사 부근에 고허성의 유지로 추정되는 신라 때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고위산은 곧 고허산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 보면서 돌산고허촌의 돌산을 오늘날 경주시 남산의 고위봉(高位峰: 금오산)으로 파악하는 한편, 고허촌은 그 산 서쪽의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일대로 추측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서는 돌산고허촌이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에 '남산부(南山部)'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구량벌(仇良伐),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촌이 남산부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구량벌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해당하는 지명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고허촌의 범위를 경주시를 넘어 남쪽으로 울산 방면까지 확장시켜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량벌촌이 남산부 또는 그 전신으로서 사량부에 속한 것은 고려 초기 내지 신라 후기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신라 초기 돌산고허촌 단계에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아울러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에서 돌산고허촌을 비롯한 6촌을 '진한 6부(辰韓六部)'로 표현한 것을 중시하여 6촌은 곧 진한의 6개 소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6촌의 위치도 경주 지역이 아니라 진한 소국들이 분포한 경상도 전역으로 범위를 넓혀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신라 시조 혁거세 설화에서 돌산고허촌은 혁거세 출현 이전에 ‘조선(朝鮮)’ 즉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에 분산 거주하면서 이룬 촌으로서, 혁거세가 신라를 세울 때 주도적으로 참여한 집단으로 나온다. 특히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남기고 간 큰 알을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돌산고허촌의 지배층이 혁거세를 도와 신라를 건국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는 6촌장의 천강(天降) 설화가 실려 있는데,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하는 촌장이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돌산고허촌을 이끌었으며, 그가 곧 사량부 '정(鄭)'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애초에 돌산고허촌으로 불리던 곳이 신라 건국 과정에서 진한 6부의 하나로서 '고허부(高墟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32년(유리이사금 9) 봄에 '사량부'로 개명되면서 '최(崔)'씨라는 성씨가 하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에 실제로 중국식 성씨인 정씨나 최씨를 칭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파악하며, 나아가 6촌이 곧바로 후대의 6부로 이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과 돌산고허촌의 후신으로서 각각 이씨와 정씨 또는 최씨의 성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양부(梁部)와 사량부가 실제 6세기 신라 금석문상에서는 김씨 왕실이 속한 부들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