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절 이름은 천녀(天女)와 용녀(龍女) 두 딸을 가졌던 부모가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천룡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위치가 묘하여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계림 땅에는 딴 곳에서 흘러 온 두 물줄기와 거슬러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들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서 가라앉는 재앙이 생긴다.”고 하였다. 또, 중국의 사신 악붕구(樂鵬龜)는 이 절이 파괴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 말에 와서 쇠잔, 파괴되었고, 그 뒤 1040년(정종 6) 최승로(崔承老)의 손자 최제안(崔薺顔)이 중창하고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했으며, 조정의 명을 받아 다시 신서(信書)의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이 원문에 따르면 그가 왕의 건강과 국가의 태평을 원하여 이 절에 전당(殿堂)과 낭각(廊閣) · 방사(房舍) · 주고(廚庫) 등을 신축하고, 석불(石佛) 등 몇 구를 봉안하여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했다는 것과 납입전(納入田)으로 사원을 운영하고, 자체 승려 중에서 재주와 덕이 빼어난 고승을 뽑아 주지를 삼는 전통을 삼을 것을 명기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신령스럽고 신기한 일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그 뒤 면면히 명맥을 이어 오다가 약 200년 전에 폐사가 되었으며, 최근에 옛터 북쪽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였다.
1990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의 발굴조사와 이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총 11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금당(金堂)은 고려시대 이후 16세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절터에 무너져 있던 폐탑은 1990년에 복원하여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귀부는 현재 민가의 마당 가운데 있는데 비신(碑身)은 잘렸고, 거북 모양의 기단부만 남아 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산허리에 석조가 1기 있는데, 흥륜사지(興輪寺址)에서 발굴된 석조와 버금가는 큰 것으로 가로 3.8m, 세로 1.5m에 이른다. 석조에서 다시 아랫마을 쪽으로 오면 맷돌 1기가 있다.
이 절 뒤편에는 용두암(龍頭岩)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가 천룡사의 석조와 연결되어 수원(水源)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두암을 지나면 천룡사에 있다가 구도행각(求道行脚)의 길을 떠난 여인의 이야기가 얽힌 열반곡(涅槃谷)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