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대에 17관등제가 구비된 이후 최고 관등인 각간에 오른 귀족이 군공을 비롯한 공(功)을 세우게 되었을 때 포상과 격려 차원에서 각간을 뛰어넘는 관등을 수여할 필요가 생기면서 비상설로 두어졌다.
『삼국사기』 권38 직관지에는 태종무열왕 때 백제를 멸망시키고 논공행상을 하면서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대각간을 수여한 것이 시초로 나온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권44 거칠부 열전에는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에게서 한강 유역을 탈취하기 위하여 북진을 개시할 때 구진(仇珍) 대각찬(大角湌) 등을 파견하였다고 나온다.
실제로 561년(진흥왕 22)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도 각간의 이칭인 일벌간 앞에 ‘대’ 자가 들어간 대일벌간(大一伐干)의 존재가 확인되어, 대각간에 해당하는 관등이 처음 설치된 것은 진흥왕 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삼국을 통일하면서 김유신과 김인문(金仁問) 등이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하대에는 원성왕의 부친인 김효양(金孝讓)과 경문왕의 아우이자 진성여왕의 배필로 알려진 김위홍(金魏弘) 등이 대각간을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금석문 상에서는 무진사(无盡寺) 종명(745)과 성덕대왕신종명(771)에 각각 김사인(金思仁)과 김옹(金邕)이 대각간이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2005년에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내부에서 발견된 묵서명(883)에도 김위홍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관등으로 '대각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3 탑상편 백률사조에는 효소왕 대에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을 대각간으로 삼았다는 설화가 나오는데, 이 경우는 상례를 뛰어넘는 면이 있어, 곧장 신뢰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