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년(경문왕 2)에 상재상(上宰相) 이찬(伊飡)으로서 황룡사구층탑 중수의 총 책임을 맡았다. 당시 그의 벼슬은 황룡사성전감수성탑사 수병부령평장사(黃龍寺成典監脩成塔事守兵部令平章事)였다.
그는 조카 헌강왕이 즉위하자 875년(헌강왕 1)에 위진(魏珍)의 후임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어 헌강왕의 정무를 보좌하였다.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그 전부터 사랑하던 위홍을 궁중에 불러들여 정치를 맡겼다.
888년에 그는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신라시대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만들었다. 이 해에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애통해 하며 그에게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897년에 진성여왕은 조카인 태자 요(嶢: 효공왕)에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뒤 북궁(北宮)에 혜성대왕의 명복을 비는 원당(願堂)을 세워 명복을 빌다가 여섯 달 뒤에 죽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에는 위홍이 진성여왕의 배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책의 기이(紀異) 진성여대왕거타지조(眞聖女大王居陀知條)에는 여왕의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으로서 여왕의 총애를 받아 정권을 독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성여왕과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았으며 진성여왕 즉위 후에는 궁중에 불려들어가 정사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책에 따라 사실이 매우 다르게 기록되었으나, 신라 당대에 쓴 해인사 양간문서(樑間文書)를 직접 보고 쓴 조선 초기 조위(曺偉)의 글에서 혜성대왕의 시호를 올리는 특수한 추존과 원당의 창설, 명복의 기원 등을 감안할 때 위홍이 처음에는 유모의 부군이었다가 유모가 죽은 뒤에 진성여왕의 부군이 된 듯하다.
그는 각간 · 상대등 · 병부령 등의 관직을 맡아 정치 ·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경문왕 때는 국왕의 동생으로, 헌강왕 · 정강왕 때는 왕의 작은아버지로, 진성여왕 때는 왕의 작은아버지에다 정부로 일세를 주름잡던 집권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