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5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에 배경설화와 함께 향찰 표기의 원문 8구가 전한다. 후구(後句)는 잃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10구체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문헌에 따르면,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신충과 함께 궁정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뒷날 왕위에 오르면 신충을 잊지 않겠노라고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는 그 일을 잊어버리자 신충이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걸었더니 나무가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효성왕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충을 등용하였다. 그랬더니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가>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노래로 <혜성가 彗星歌>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즉, 왕과 잣나무가 동일시되어 은유관계가 성립하고, 잣나무에 작용하는 것은 곧 왕에게 작용하는 것이 된다. 잣나무에게 인간과 같은 생명을 부여하는 애니미즘적 심리와 자연계의 잣나무와 인간인 효성왕을 동일시하는 토테미즘의 심리가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래 자체에는 주술적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고 서정시적인 정조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노래의 원문과 그 해독 및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汝於多攴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攴如攴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鳥隱第也
② 해독
갓 됴히 자시/ᄀᆞᄆᆞᆯ 안ᄃᆞᆯ곰 ᄆᆞᄅᆞ디매/너를 하니져 ᄒᆞ시ᄆᆞ론/울월던 ᄂᆞᄎᆡ 가ᄉᆡ시온 겨ᅀᅳ레여./ᄃᆞ라리 그르매 ᄂᆞ린 못ᄀᆞᆺ/널 믌겨랏 몰애로다./즈ᅀᅵ○ ᄇᆞ라나/누리 모ᄃᆞᆫ갓 여ᄒᆡ온ᄃᆡ여.
③ 현대어 풀이
질 좋은 잣이 가을에 말라 떨어지지 아니하매 너를 중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에여. 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갓 지나가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모습이야 바라보지만 세상 모든 것 여희여 버린 처지여
여기서 앞의 4구는 배경설화에 소개된 노래의 유래 설명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효성왕이 작자에게 잣나무를 두고 맹세한 사건의 경위가 그대로 노래의 문맥에 표출되어 있다. 잣나무는 상록수이므로 가을이 되어도 낙엽이 지지 않는다. 그 불변의 상록수처럼 작자를 중용(重用)하겠다는 왕의 약속과는 달리 왕의 태도는 차가운 겨울처럼 돌변하였다. 제4구의 비유적 표현은 왕의 냉혹한 약속 위반을 의미한다. 이 부분까지는 왕의 태도변화에 대한 작자의 원망이 분출되어 있다.
뒤의 4구는 앞 4구의 결과로 인하여 고난에 처한 작자의 상황을 자탄하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못의 물결에 일그러지는 달 그림자, 물결에 밀려나는 모래로 작자의 고난에 찬 현실, 등용되지 못하고 소외당한 현실을 차원 높은 비유로 노래하였다. 그 밑바탕에는 물론 원망의 감정이 응어리져 있다. 왕을 존경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현실의 상황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처지’라고 절망으로 끝맺었다.
이처럼 작품 전체에 왕의 약속 위반에 대한 원망과 그로 인한 소외감 및 좌절·절망의 심경이 처절하게 분출되어 있다. 맨 끝구절은 의연한 체념으로도 볼 수 있고 소외된 자의 처절한 절망으로 볼 수도 있다. 후자의 관점을 따를 경우, 이러한 절망의 감정은 곧 원망과 접맥되어 있으며, 이 같은 원망의 언어가 주술력을 얻어 잣나무를 시들게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제작연대에 대하여 다소 논란이 있었다. 배경설화에 따르면 효성왕 원년(737)이나 효성왕 2년(738)이 되나 경덕왕대에 지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작자 신충의 생애에서 왕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을 만한 절실한 시기는 효성왕 재위 때보다는 작자가 상대등의 직위에서 면직되던 경덕왕 22년(763) 이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배경설화와 노래가 일치하지 않으며, 효성왕 재위시에도 작자가 왕을 원망할 만한 상황이 주어졌고, 신충은 그 2년 뒤에 노래의 효험으로 중시(中侍)로 등용되었기에 효성왕대로 봄이 더욱 타당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효성왕을 시적 독자로 하였을 경우에 왕이 맹세를 깨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우선 왕으로 하여금 맹세를 이행하도록 일차적으로 촉구한다. 다른 면으로는 그 보증자이고 징계주체인 잣나무로 하여금 보증과 징계의 책임을 지고 변색하여 왕이 이 변색을 보고 맹세를 이행하도록 다시 촉구하는 동시에 나무에 이상이 발생하며 왕권에 흉한 일이 일어난다는 속신(俗信)을 바탕으로 왕에게 다시 압박을 가하는 삼중의 장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소재로 ‘잣’·‘물’·‘달’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와 동일하다. 그러나 후자에서 그것은 원형상징(原型象徵)으로 쓰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상징어로서가 아니라 작자의 개인 서정을 노래하는 비유어로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형상징으로 쓰일 경우에 그것은 풍요와 번영·영원을 상징하지만, 비유어로 쓰일 경우에 그러한 상징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만 수행할 뿐이다.
따라서 원형상징의 기능은 고대적(古代的)인 사유(思惟), 즉 전 논리(前論理)를 바탕으로 한 집단서정의 표출에 있지만 비유어의 기능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인 서정 표출에 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하여 신라 향가에서 원형상징의 해체와 개인 서정의 표출로 전환되는 시기를 이 작품의 출현에서 단서를 잡는 견해도 있다.
즉, 경덕왕대에 율령제가 실시되면서 한문화적(漢文化的)인 합리주의가 정치·문화적 기반이 되면서 원형상징은 해체를 맞고 합리적 사고에 입각한 개인 서정이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배경을 깔고 <원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이 노래가 주술에 바탕을 둔 서정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사뇌가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었으나, 개인의 감정을 차원 높게 승화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찬기파랑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