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장은 71세 되던 해인 1760년(영조 36)에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노가재(老歌齋)를 짓고, 만년을 여기에 묻혀 여러 벗을 비롯하여 후배들과 함께 활발하게 시조창작과 가악활동을 하였다. 김시모(金時模)가 지은 <노가재기 老歌齋記>나 그 밖에 이와 관계있는 시문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하건대, 김수장과 교분이 두터웠던 김우규(金友奎)·박문욱(朴文郁)·김중열(金重說)·장복소(張福紹)·이덕함(李德涵) 등 여러 가객들이 이 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수장은 그가 지은 사설시조를 분석해보건대,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신명나게 살기 위해 음악과 문학의 세계에 탐닉하여 유락적(遊樂的) 취향의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김수장과 그의 동료 가객들이 시조창작에 가담하자 시조는 특정 집단의 이념을 표출하는 도구에서 시정의 정서와 세태를 정확히 반영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들은 선배인 김천택(金天澤)과 달리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나 예술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창작하였고, 풍류남으로서 호방한 기질로 성정(性情)의 자유를 희구하며 이를 노골적으로 시조에 드러냈다. 노가재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해동가요(海東歌謠)』의 부편(附篇)인 『청구가요(靑邱歌謠)』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집의 수록 작가나 작품의 문학성도 중요하지만, 각 작가의 작품 끝에 붙인 후서(後序)는 당시 가악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청구가요』는 김수장이 노가재를 중심으로 한 가단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낸 작품을 뽑아 엮은 것으로, 바로 노가재가단 활동의 결실이다.
이 가단의 명칭은 당시 실제로 불린 것은 아니고 김수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객들의 활동 전체를 포괄하여 일컫는 용어이다. 따라서 노가재가단의 형성시기는 김수장이 노가재를 지은 이후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가단이 활동을 하던 18세기경에는 평민문학이 대두하여 평민층과 중인계층의 참여 아래 성장하면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김천택과 김수장 두 사람은 각각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를 편찬하는 등, 당시 가객들의 모임을 주도했던 중심 인물이다. 종래에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이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인정받았으나 요즘의 연구결과를 따르면 김천택과 김수장은 작시 태도, 작품의 경향이나 기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른 입장이고, 더욱이 김수장은 김천택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 경정산가단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는 견해는 의문시된다.
김천택과 김수장은 당대 가단의 양대 거목으로 서로 별도의 모임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택이 얼마간 보수적이고 완고한 것과는 달리, 풍류인들의 집결장이요 가객들의 교습장이며, 후배 양성의 도량인 노가재를 중심으로 한 노가재가단은 당시 가악계의 중추로서 시조문학의 창작과 창(唱)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경정산가단과 달리 노가재가단은 예인으로서 전문 가객이었으며, 신분적 한계의 돌파구나 자족적 삶의 구현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였다. → 경정산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