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 ()

불교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한 사찰.
유적
건립 시기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
관련 국가
통일신라
관련 인물
문무왕, 신문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원
내용 요약

감은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사찰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하였다. 682년(신문왕 2)에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성전사원으로 기능하였다. 현재는 동서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한 사찰.
발굴경위 및 결과

1929년에 감은사지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감은사는 주1까지 온전하고 금당지는 일부 매몰되었으나 기단의 일부 구조 파악은 가능하였다. 1959년 발굴 조사를 통해 주2 배치 전반이 파악되었으며, 서탑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사리 장엄구가 일괄 발견되었다. 1979년 2차 발굴 조사를 통해서 회랑지를 포함해 건물지 전체 윤곽과 서쪽 건물지 주20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또 금당지 동쪽 기단을 관통하는 작은 구멍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정지(正至) 11년명 주8, 금동 주11, 금동여래입상 2구 등이 출토되었다. 1995~1996년에 걸쳐 복원 작업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탑의 사리 장엄구 일괄을 발견했다. 2005~2008년에는 동 · 서 두 탑을 해체 · 수리하였다.

건립 경위

『삼국유사』 주5조에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창건한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이때 건립된 금당 주9 아래에 용이 들어와 서리고 있을 수 있도록 구멍을 하나 두었고, 사찰의 이름을 감은사라 하고 문무왕의 유골을 간직한 곳을 주6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감은사 창건은 신문왕 때인 682년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문무왕 때부터 불사가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감은사는 영묘사(靈廟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 기능하는 등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현유가해화엄조에서는 754년(경덕왕 13)에 대덕 법해(法海)가 동해의 바닷물을 넘치게 하였는데 이때 감은사의 불전 계단 앞까지 그 물이 이르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혜공왕경문왕이 766년(혜공왕 12)과 864년(경문왕 4)에 각각 감은사에 행차했다고 전한다. 또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따르면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 주12 김양상(金良相)이 종의 조영에 참여하였고, 황룡사찰주본기에서는 감은사의 주10직 승려들이 중창 불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감은사는 창건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중요한 사찰이었다고 판단된다.

고려시대 기록에 감은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1979년 발굴 조사 청동 금고 명문의 정지 11년이 1351년(충정왕 3)이므로 이 절이 고려 후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인용하여 감은사를 기록하였는데 폐사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에 이덕홍이 동해안의 경승지와 경주를 유람하고 쓴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한 쌍의 탑이 있는 감은사 터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6세기 전반까지는 유지되다가 이후에 탑만 남고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감은사는 연대산을 등지고 대종천을 바라보는 방향에 입지하고 있다. 문무왕의 주7로 알려진 경주 문무 주13(사적 158호)이 대존천을 따라 가면 이르는 근처 바다에 있으며 신문왕대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고사와 관련 있는 경주 이견대(사적 159호)가 문무 대왕릉 가까이에 있다.

감은사의 가람 배치는 금당지를 중심으로 중문지와 강당지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를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금당지 주위로 주15이 있으며, 그 옆에 중앙의 석등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국보 제112호 동서 삼층 석탑이 금당지 앞에 나란히 남아 있다. 이 탑들은 감은사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제일 윗부분인 주16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 석탑, 나원리 오층 주17 등과 함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탑파 양식을 따르고 있다. 쌍탑 중 서 삼층 석탑에서 왕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주18이 발견되었고, 1996년 동 삼층 석탑을 해체 · 수리할 때 서 삼층 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각각 국보 366호 및 보물 1359호로 지정되었다.

의의 및 평가

감은사지는 우리나라 고대 쌍탑 가람 배치의 전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 두 탑에서 발견된 사리 장엄구는 석탑 내에서 일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사리 장엄구의 구성과 사리 봉안 방식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동경유록(東京遊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룡사찰주본기(皇龍寺刹柱本記)」

단행본

『感恩寺 : 發堀調査報告書』(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7)
『韓國의 寺址-대구광역시 경상북도』(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2)

논문

趙由典, 「感恩寺址 發掘調査 槪報」(『佛敎美術』 10, 佛敎美術社, 1991)
蔡尙植, 「新羅統一期의 成典寺院의 구조와 기능」(『釜山史學』 8, 부산사학회, 1984)
주석
주1

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 우리말샘

주2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우리말샘

주3

사리는 봉안하는 데 쓰는 공예품.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것을 감싸는 외함으로 이루어진다. 외함으로는 주로 항아리가 사용된다. 우리말샘

주4

정당(正堂)의 좌우에 있는 긴 집채. 우리말샘

주5

신라 때의 전설상의 피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뒤,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海龍)과 김유신이 죽어서 된 천신(天神)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서 보낸 대나무로 만들었다 하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6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 왕릉. 사적 정식 명칭은 ‘경주 문무 대왕릉’이다. 우리말샘

주7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장소. 우리말샘

주8

절에서 쓰는 북 모양의 종. 여러 사람을 모을 때 친다. 우리말샘

주9

집채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 우리말샘

주10

절에서 재(齋)의 의식을 지휘하는 소임. 또는 그 소임을 맡아 하는 사람. 우리말샘

주11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우리말샘

주12

신라 때에 둔, 십칠 관등 가운데 첫째 등급. 자색 관복을 입었다.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우리말샘

주13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 왕릉.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그 안에 동서남북으로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유골은 수로의 교차점에 놓인 넓적한 돌 아래에 매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사적이다. 우리말샘

주14

신라 때의 전설상의 피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뒤,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海龍)과 김유신이 죽어서 된 천신(天神)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서 보낸 대나무로 만들었다 하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15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 우리말샘

주16

불탑 꼭대기에 세운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 우리말샘

주17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 8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층 기단 위에 오 층의 탑신이 있다. 높이는 8.8미터이고, 국보 정식 명칭은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이다. 우리말샘

주18

사리나 유골을 넣는 용기. 우리말샘

주19
주20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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