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성전 ()

고대사
제도
신라시대 감은사(感恩寺)에 설치한 성전(成典)으로사원의 수선과 유지 등을 담당하던 관부.
정의
신라시대 감은사(感恩寺)에 설치한 성전(成典)으로사원의 수선과 유지 등을 담당하던 관부.
개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 봉덕사(奉德寺), 봉은사(奉恩寺), 영묘사(靈廟寺), 영흥사(永興寺) 등 7개 사원의 성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기능과 성격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원의 수선과 유지 및 경제적 관리를 담당한 기관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성전사원이 주로 경주지역에만 집중되어 있고 왕실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기 때문에 원당사원(願堂寺院)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신라의 불교통제기관과 관련하여 관사적(官寺的) 기능을 지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내용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잡은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왜병 진압을 위해 창건하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은 뒤 신문왕이 부왕을 추복(追福)하기 위해 681년(신문왕 1)에 완성하였다.

감은사에 성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759년(경덕왕 18)에 감은사성전을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개칭했다는『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7세기 말 혹은 8세기 초에 설치된 듯하다.

감은사성전은 다른 여러 성전들과 마찬가지로 왕실 발원에 의해 창건된 원찰로서 감은사의 조영과 수리뿐만 아니라 왕실의 봉사기관(奉祀機關)으로서의 기능도 가졌다. 감은사성전의 소속관원으로는 처음에는 금하신(衿荷臣) 1인, 상당(上堂) 1인, 적위(赤位) 1인, 청위(靑位) 1인, 사(史) 2인이 있었다.

변천과 현황

759년의 관제개혁 때에 감은사성전의 명칭이 수영감은사사원으로 바뀜에 따라, 금하신은 검교사(檢校使)로, 상당은 부사(副使)로, 적위는 판관(判官)으로, 청위는 녹사(錄事)로, 사는 전(典)으로 개칭되었다.

776년(혜공왕 12)에는 다시 원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가 애장왕 때에 다시 금하신은 영(令)으로, 상당은 경(卿)으로 개칭되었다. 금하신이 될 수 있는 관등은 대아찬(大阿湌)에서부터 각간(角干)까지이며, 상당은 내마(奈麻)에서 아찬(阿飡)까지이고, 청위는 사지(舍知)에서 나마까지였다.

참고문헌

『신라(新羅)의 폐사(廢寺)』Ⅰ(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삼국사기(三國史記)』
「통일신라 금석문을 통해본 승관제도(僧官制度)」(정병삼,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62, 1995)
「통일신라 사원성전(統一新羅 寺院成典)과 불사(佛事)의 조영체계(造營體系)」(박남수, 『동국사학(東國史學)』28, 1994)
「신라 사원성전(新羅 成典寺院)의 성립(成立)」(이영호, 『신라문화(新羅文化)의 재조명(再照明)-신라문화제 학술발표대회논문집(新羅文化際 學術發表大會論文輯)』제14집, 1993)
「신라통일기(新羅統一期)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의 구조와 기능」(채상식, 『부산사학(釜山史學)』8, 1984)
「신라중대 왕실사원(新羅中代 王室寺院)의 관사적 기능(官寺的 機能)」(이영호,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43, 1983)
「황룡사구층탑지(皇龍寺九層塔誌)의 연구(硏究)」(변선웅, 『국회도서관보(國會圖書館報)』10권 10호, 1973)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