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5권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최치원이 중국 화이난(淮南)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올린 것이다. 그 서(序)에서 최치원이 당시까지 지은 저술을 총괄하여 잡시부 및 표주(表奏)를 모은 것 28권이라 하고, 그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목록에는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 1권, 5언·7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체시(雜體詩)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계원필경집』만이 유일하게 현전하고 있다.
『중산복궤집』은 다른 저작과는 달리 『계원필경집』과 같이 1부로 꾸며져 있다. ‘집’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아 5권 1책으로 편집된 단행본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저작 가운데 앞의 시부는 중국에 들어간 초년에 지은 것이라 하였다. 『중산복궤집』은 선주표위(宣州漂尉)에 임명된 뒤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중산복궤집』의 저작동기는 ‘녹봉은 후하고 벼슬자리는 한가로워 하루종일 배불리 먹으면서, 공사간에 지은 것’을 5권으로 모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산복궤집』이다. 『계원필경집』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중산복궤집』의 명칭에서 ‘중산’은 예로부터 명필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선주에 있는 지명이다. ‘복궤’라는 말은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공자가 성과를 이루려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비유로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덮는 것과 같은 미미한 것도 자신이 노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 내용을 따다 붙인 것이다.
『중산복궤집』은 중국에서 초기의 시험적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집으로서의 『계원필경집』이 저작되기에 앞서 지어진 것으로, 저자가 중국에 가서 활동하면서 가장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안정된 시기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