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十八史略)』은 원나라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원래 명칭은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으로, 태고(太古) 때인 천황씨(天皇氏)부터 송나라 말까지의 사실(史實)을 십팔사(十八史)에서 발서(拔書)하여 초학자를 위한 초보적 역사교과서로 편찬한 것이다. 중국 왕조의 흥망을 알 수 있고, 많은 인물의 약전(略傳)·고사(故事)·금언(金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원나라에서 간행된 책은 2권이었다. 명나라 초기 진은(陳殷)이 음과 해석을 더하여 7권으로 만든 음석본(音釋本)이 있으며, 음석본에 유염(劉剡)이 보주(補注)를 가하여 간행한 것이 현행본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서 시작하여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이르는 17종의 정사(正史), 송대(宋代)의 『속송편년자치통감(續宋編年資治通鑑)』, 『속송중흥편년자치통감(續宋中興編年資治通鑑)』 등 18사의 서적에서 풍교(風敎)에 관계 있는 말을 발췌하여 천황씨(天皇氏)부터 송나라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십팔사략』 현행본이 언제 조선에 전해졌는지 상세하지 않으나, 1403년(태종 3)에 명나라 태감 황엄(黃嚴)이 관복과 비단 그리고 『원사(元史)』 등과 더불어 『십팔사략』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즉 중국에서 간행되고 곧 조선으로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許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증선지의 『사략』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성현(成俔)이 매우 좋아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전래 초기 단계에서부터 사대부들의 애호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성옹지소록」에 김수(金晬)가 어릴 때부터 『사략』을 좋아하여 공부가 매우 깊었다는 기록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는 초학 시기에 이 책을 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수는 훗날 선조의 명을 받아 이 책을 교정하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는 “선조가 사저 시절에 『사략』을 의원 양인수(楊仁壽)에게 배웠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이 책이 매우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읽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1765년 동지사 서장관 홍억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했던 홍대용(洪大容)은 북경에서 엄성(嚴誠)과의 문답에서, 조선에서는 처음 글을 배울 때 『천자문』, 다음에 『사략』을 읽고, 다음에 『소학』, 경서를 읽는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이 역사서가 초학자 교과서로 활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몽학에게 반드시 『통감』과 『사략』을 가르친다.”라고 한 데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이 책이 중국의 역사와 아울러 한문을 익히기 위하여 조선 초기부터 학동들에게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는 1678년(숙종 4) 중국의 부칙시위(副勅侍衛) 갈(喝)이 와서 『석주집(石洲集)』 · 『읍취헌집(挹翠軒集)』 등의 우리나라의 문적을 비롯하여, 『십팔사략』과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가져갔다는 기록도 있다.
『사략』은 초입부에 허황된 내용이 많고 지나치게 축약이 심하여 문리가 통창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중종실록』 1525년(중종 20) 8월 8일(을미) 2번째 기사에 “신이 전일에, 낮에는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진강하기를 청한 것은, 옛 사람들의 행사 관찰하기를 눈앞 사림들의 소위를 보는 것처럼 하게 하려 한 것이니, 올해와 내년을 지내면 자연히 해득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십팔사략』에 『원사』를 포함한 『십구사략』이 모두 유통되어 읽혔다. 따라서 조선 학자들이 흔히 말한 『사략』이 ‘십팔사략’인지 ‘십구사략’인지 불명확하나, 초학자의 역사교과서로 사용되었던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두 책 모두 좋은 책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에서 “『통감(通鑑)』이나 『사략』은 우리 나라에서는 숭상하지만, 중국에서는 숭상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조위한(趙緯韓)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이 중국과 같은 수준이 될까 걱정하여 『사략』과 『고문진보』를 우리나라에 보냈다.”고 지적하고, 그 이후 문장의 수준이 점차 낮아져 옛날에 미치지 못하니 한스럽다고 평가하면서, 『사략』과 『고문진보』의 해독성을 비판하였다.
홍한주(洪翰周)는 『지수염필(智叟拈筆)』에서 “『사략』이 국초부터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와 함께 궁중에 널리 읽혀졌다. 그래서 자신도 어렸을 때에 이것을 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청나라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조차 편차되지 못하였던 것을 살피면 중국 사람조차 이 책을 양서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략』은 온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평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종숙부가 『사략』을 이어 『명사(明史)』를 지었는데 『사략』을 이어 책을 짓는 것이 옳지 않음을 서술하였다.
이처럼 『사략』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공과(功過)가 뒤섞여 일방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초학자의 학습서로서 우리 문화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활자본 · 목판본 『십팔사략』 또는 『십구사략』이 매우 많으며, 방각본으로도 간행되었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방각본은 『십팔사략』 전체 중에 주로 1권만 간행하였는데, 이는 서당에서 초학자에게 『십팔사략』 1권을 주교재로 사용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