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에 과거로서 이름을 날리었다. 곧 승문원의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 · 이덕형(李德馨) · 이정귀(李廷龜) 등이 모인 자리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문(陳奏文)을 초안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의 천거를 받아 다음날 설서(說書)에 승진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을 지내다가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볼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장유(張維) · 이명한(李明漢) 등과 교유하며 삼각산에서 독서하였다. 1619년에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 때 강홍립(姜弘立)이 후금군에 항복을 알리는 부경진주사(赴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갔다왔으며, 다음 해에 괴산군수가 되어 많은 기민(飢民)을 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순검사 종사관으로 삼남을 순찰하였다.
1621년에는 종사관으로 원수 한준겸(韓俊謙)을 따라 관서(關西)의 군무(軍務)를 돌아보고 돌아와 삼각산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8학사의 한 사람이라 해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이 되었다.
곧 지평(持平)으로 옮겨서 풍기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 수찬(修撰) · 교리(校理) · 헌납(獻納)이 되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로 뽑혀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지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가 되어 바닷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6년 청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부승지로서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도에 호송했으며, 우승지 · 사옹원제조 · 상의원제조 · 형조참의 · 여주목사 · 예조참의 · 경상도관찰사, 좌승지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163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마침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假島)에 유진(留鎭: 진을 치고 주둔함.)하자, 대청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송도에서 죽었다.
문장이 간결 명료하였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