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皞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여주목사 민세주(閔世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영(閔韺)이고, 아버지는 참판 민응협(閔應協)이며, 어머니는 김수현(金壽賢)의 딸이다. 민암(閔黯)이 형이다.
1650년(효종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과 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했으며,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 7000여 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癘病)에 신음하는 3,600여 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인 민희는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해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62년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 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고 해서 파직되었다. 그 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669년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와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민희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정계에서의 활약이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 차이로 남인이 갈라질 때,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1686년에 풀려나서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