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적 (𥛚)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서, 판의금부사, 우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하(景賀)
창백헌(蒼白軒), 남애(南厓), 계형(繼亨)
시호
효정(孝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5년(숙종 1)
사망 연도
1755년(영조 31)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판서|판의금부사|우빈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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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판서, 판의금부사, 우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남애(南厓)·계형(繼亨). 권전(權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권양(權讓)이고, 아버지는 승지 권수(權𢢝)이며, 어머니는 이상응(李尙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0년(숙종 36) 생원이 되고,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1716년(숙종 42) 검열(檢閱)이 된 뒤 대교(待敎)·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1725년(영조 1) 지평(持平)·사서(司書)·부수찬(副修撰)·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校理)·헌납(獻納)·이조좌랑·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1727년(영조 3) 대사간, 이어 승지가 되어 1732년(영조 8)까지 이 두 직을 번갈아 가며 역임하다가 1733년(영조 9)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강화유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황선신(黃善身)·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 3인을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도록 상소하였다.

1740년(영조 16) 대사헌·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도승지·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742년(영조 18) 병조참판이 되어 민정에 관한 단잠팔장(短箴八章)을 올렸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된 뒤, 호조참판·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745년(영조 21)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대사성을 지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함경도과시관(咸鏡道科試官)으로 나갔으며, 이어서 한성부판윤·형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를 거쳤다.

1749년(영조 25) 판의금부사, 1751년(영조 27) 우빈객(右賓客)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1754년(영조 30)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계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창백헌집(蒼白軒集)』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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