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 · 남애(南厓) · 계형(繼亨). 권전(權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권양(權讓)이고, 아버지는 승지 권수(權𢢝)이며, 어머니는 이상응(李尙膺)의 주1
1710년(숙종 36) 생원이 주2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을과로 주3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1716년(숙종 42) 검열(檢閱)이 된 뒤 대교(待敎) · 봉교(奉敎) · 정언(正言) 등을 거쳐 1725년(영조 1) 지평(持平) · 사서(司書) · 부수찬(副修撰) · 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校理) · 헌납(獻納) · 이조좌랑 · 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1727년(영조 3) 대사간, 이어 승지가 되어 1732년(영조 8)까지 이 두 직을 번갈아 가며 역임하다가 1733년(영조 9)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강화유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황선신(黃善身) · 강흥업(姜興業) · 구원일(具元一) 3인을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도록 상소하였다.
1740년(영조 16) 대사헌 ·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도승지 ·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742년(영조 18) 병조참판이 되어 민정에 관한 단잠팔장(短箴八章)을 올렸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된 뒤, 호조참판 ·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745년(영조 21)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 · 대사성을 지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함경도과시관(咸鏡道科試官)으로 나갔으며, 이어서 한성부판윤 · 형조판서 · 좌참찬 · 예조판서를 거쳤다.
1749년(영조 25) 판의금부사, 1751년(영조 27) 우빈객(右賓客)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1754년(영조 30)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계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창백헌집(蒼白軒集)』이 있다. 시호는 주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