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광해군 4) 2월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경립(金景立, 일명 濟世)을 체포한 뒤, 유팽석(柳彭錫)을 시켜 무옥(誣獄)을 꾸미게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즉, 신율은 체포된 김경립에게 8도에 각각 대장(大將) · 별장(別將)을 정해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며, 김경립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金翼辰)에게는 팔도도대장(八道都大將)이 김백함(金白緘)이며, 김백함은 아버지 직재의 실직(失職)에 대한 불만을 품고 모역하였다고 진술하게 하였다. 신율은 김백함의 할아버지 김흠(金欽)이 왜적에게 희생되자, 희생된 흠의 원수를 갚기 위해 흠의 아들인 직재가 아버지 상중(喪中)에 종군해 주육(酒肉)을 먹은 사실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실직한 과거 사실을 알고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직재의 사위 황보 신(皇甫信) 및 일족이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김백함은 모역에 대해 극구 부인하다가, 끝내 고문에 못이겨 자신이 모역의 주동자라는 허위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이호민(李好閔), 전 감사 윤안성(尹安性), 전 좌랑 송상인(宋象仁), 전 군수 정호선(丁好善), 전 정언 정호서(丁好恕) 등 수십 인과 모의하여 날짜를 정해 서울을 침범하려 하였다고 무복(誣服)하였다.
이 사건은 박동량(朴東亮)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옥사가 강행되었다. 결국 그들이 추대하려는 왕이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 태경(晉陵君泰慶)이라고 하였으며,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김직재 · 김백함 부자와 황보 신 등이 처형되고, 김척(金滌) · 유팽석(柳彭石) · 김일승(金日昇) · 정몽민(丁蒙民) 등은 심문 중 사망해 정형(正刑)을 받았다. 유선(柳愃) · 황혁(黃赫) · 조수륜(趙守倫) · 권필(權韠) · 황상(黃裳) · 김덕재(金德哉) · 김삼함(金三緘) · 김강재(金降哉) 등이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또한, 송상인 · 황석(黃奭) · 신희업(辛喜業) 등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양원(梁榞) · 김용(金溶) · 김여준(金汝峻) · 신경상(申景湘) · 김제(金濟) · 유열(柳悅) · 유문석(柳文錫) · 이징수(李徵洙) 등이 절도(絶島)에 유배되는 등 벼슬에서 쫓겨난 자도 많았다. 그리하여 옥사에 희생된 자만도 100여 인에 달하였다. 결국 이 옥사는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신율에 의해 조작되고 대사간 이이첨 · 유인길(柳寅吉) 등이 당시 사회에서 가장 불우하고 불평이 많던 김직재의 일족을 희생물로 삼아 소북파 유영경(柳永慶) 등의 잔당을 제거하려고 꾸민 무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