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성구(聖求), 호는 서곽(西郭). 부사맹(副司猛) 송승은(宋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송전(宋琠)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복흥(宋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아우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예문관검열을 거쳐 함경도북평사(咸鏡道北評事)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형조좌랑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10년 동안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소환되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오르고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 지방에 어사로 나가 선유(宣諭: 임금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림)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사예(司藝)·사성, 사헌부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홍문관교리·사도시정(司䆃寺正)·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다가 안동부사로 전보되었으나 그 곳에서 민정을 숙정(肅正: 엄격하고 바름)하고는 사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어사로서 충청도에서 조운(漕運)을 감독, 세공의 조달에 힘썼다. 돌아와서는 사헌부집의·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남원부사가 되었다. 부사 재임 때 작폐를 일삼던 도적을 소탕하여 어사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천, 임명했으나 사고로 사퇴하였다.
1629년에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특임되었으나, 모함으로 물러났다. 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