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초(季初), 호는 명관(冥觀). 윤간(尹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승홍(尹承弘)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 윤부(尹釜)이며, 어머니는 이사권(李思權)의 딸이다.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3년(선조 16) 복병장(伏兵將)으로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89년(선조 22) 윤탁연(尹卓然)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되어 1592년(선조 25) 남원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난민(亂民)이 관창(官倉)을 부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단신으로 말을 달려 수십 명을 죽여 난을 진압하고 남원을 사수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순검사(巡檢使)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용인에 진을 쳤다. 밤중에 순검사 등이 도망하자, 일주일 동안 말을 달려 남원에 돌아와서 전심전력으로 흩어진 군졸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이후에 안동판관과 숙천부사를 거쳐 다시 전주부사로 전직되었다. 그러나 금산에 침입해온 적군을 막지 못하고 전주의 관고(官庫)를 소각해, 많은 미곡을 소실시켰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충주목사로 등용되였다. 1594년(선조 27) 회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은성부사를 역임하는 동안 침입한 여진족 1,000여 명을 격파하고 선정을 베풀어, 1597년(선조 30) 함경도 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 유몽인(柳夢寅)의 천거로 옷감을 상으로 받고 가자(加資)하였다.
1599년(선조 3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 동부승지, 1601년(선조 34) 우승지·경주부윤을 거쳐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1603년(선조 36) 해주목사(海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608년(광해군 즉위) 전라도 관찰사, 1610년(광해군 2) 형조참판, 1612년(광해군 4) 양양부사를 역임한 뒤 1613년(광해군 5)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책록되고 파양군(坡陽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재직 중에 대북파(大北派)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15년(광해군 7) 광해군의 시기를 받던 능창군(陵昌君) 이전(李佺)의 추대 사건에 관련한 혐의로 사형되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으며 화기애애하였다. 시에도 능해 운격(韻格)이 맑고 총민해 시인의 으뜸이 되었으며, 평생 동안 「출사표(出師表)」·「이소경(離騷經)」을 즐겨 읊었다. 저서로는 『명관유고집(冥觀遺稿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