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었고, 다음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예문관 봉교(奉敎)를 거쳐, 지제교(知製敎)와 병조정랑을 역임하였고,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副提學), 1607년 병조판서,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1618년 우의정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1년 초 후금(後金)은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함락하고 요동 지역을 점령하였다. 후금은 조선에 대해 기존의 명에 대한 사대를 수정하고 후금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라는 외교적 압박을 가하였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후금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비변사를 비롯한 모든 신하는 후금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명과의 동맹을 더욱 굳건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영의정 박승종은 비록 후금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전쟁의 압박이 강하지만, 후금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직후 아들 박자흥(朴子興)과 함께 자결하였다.
1797년(정조 21) 박승종의 후손으로 직산(稷山) 사람인 박기복(朴基復)이 광해군 대 중후반 진행되었던 폐모(廢母) 논의 과정에서 박승종이 폐모론을 반대했음을 강조하면서 박승종과 그의 아들 박자흥의 관작 회복을 상소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후 1857년(철종 8)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祥)이 박승종과 아들 박자흥의 관작 회복 상소를 올렸고, 이때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