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서(景緖). 한탁(韓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수성(韓守性)이고, 아버지는 한기(韓箕)이며, 어머니는 유보정(柳寶鼎)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7년 성균관박사가 되고, 사서·정언·헌납 및 예조정랑, 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부응교가 되어 교리 이창준(李昌俊)과 함께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어 응교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으로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5년 호조참의·사예·좌우부승지·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재차 좌승지가 되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해주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부응교로 있을 때에 훈련도감의 일을 천단하고 거기에 소속되어 있던 공장(工匠)들을 사사로이 부렸다고 하여 언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7년 도승지로 승진하고, 1620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주살(誅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