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아주는 723년( 성덕왕 22) ·748년( 경덕왕 7) ·773년( 혜공왕 9)에 당나라에 토산품으로서 보낸 사실이 『 삼국사기』 · 『책부원구(冊府元龜)』 · 『당회요(唐會要)』 등의 기록에 나타난다. 869년( 경문왕 9)에는 소화어아금 · 대화어아금을 당나라에 보냈다.
이리하여 어아로 명명된 직물에는 주와 금의 종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아주와 어아금은 같은 직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아주와 어아금은 문주(紋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주는 평지에 직문(織紋)되므로 주로 생각되기도 하고 문직으로 생각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아주 · 어아금은 당나라의 태사(太糸) · 후직(厚織)의 주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급 주였기 때문에 당나라 사람에게 선호되어 오랫동안 교역품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주를 선호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가 표의(表衣) · 내의(內衣) · 반비(半臂) · 고(袴) · 대(帶) · 버선 등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세주(細紬) · 면주(綿紬)가 교역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생주 · 면주 · 정주 · 토주 등 그 종류가 대단히 많았고, 빛깔도 자적 · 초록 · 대홍 · 유청 · 분홍 · 황 · 홍 · 남 · 옥색 · 흑백 · 청색 등 다양하게 염색되었다. 그리고 근래까지도 농가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서 남녀의 의복, 이불감 등으로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도 전한 때의 기록에 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설문(說文)』에서는 주는 굵은 실로 짠 비단이라 하였다. 『급취편(急就篇)』의 주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안사고(顔師古)도 조견(粗繭)의 실로 방직한 것이라고 하여, 고급 견직물이 아니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주는 중국과 달리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섬세하고도 사치스럽게 염색되어 사용되었음이 각종 기록에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나라 의복에서 추구하는 미가 섬세, 단조로움에서 얻어지는 단아함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닌 주가 선호되었고 제직기술도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