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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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가호(家戶) 별로 조세나 역(役)을 차등 부과하기 위해, 가호를 재산이나 노동인구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등급화한 제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호등은 가호(家戶) 별로 조세나 역(役)을 차등 부과하기 위해, 가호를 재산이나 노동인구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등급화한 제도이다. 7세기에 농민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9등호제가 실시되고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여 차등 수취하는 부세제도로 변화하였다. 구분 기준에 대해서는 재산, 인정(人丁), 토지의 다과(多寡)에 의해 구분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고려에서는 가호의 재산을 고려하는 세제에서 토지 자체에 세금이 부과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요역이나 군역 차출에 활용되는 부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다가 소멸되었다.

정의
가호(家戶) 별로 조세나 역(役)을 차등 부과하기 위해, 가호를 재산이나 노동인구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등급화한 제도.
개설

중국에서는 한(漢)대에 인두세에 기초해 인별로 세금을 수취하였지만, 삼국시대에 조조(曹操)에 의해 인두세보다 조사나 징수가 간편한 호(戶)를 대상으로 한 세제가 성립하였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와 가호가 가진 재산액의 차이에 따라 호를 등급화하고, 각 호의 세액을 차등 수취하는 호등제가 실시되었다.

한국 고대에서는 고구려에서 상호 · 중호 · 하호(上戶 · 中戶 · 下戶)의 3등호제가 확인되나 호별로 수세액에 큰 차이가 없어 대체로 삼국시대까지는 여전히 인두세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들어 농민들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통일신라에 들어와 상상호(上上戶: 상상연)에서 하하호(下下戶: 하하연)까지의 9등호제가 실시되고 각 가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여 호별로 차등 수취하는 부세제도로 발전하였다.

고려에서도 9등호제가 확인되며, 조선에서는 토지세가 중심이 되면서 호등제는 퇴화하여 부역이나 군역 차출에 주로 활용되었다.

내용

중국 삼국시대에 조조가 호별로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처음 실시하였을 때에는 가호마다 정액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가호마다 노동인구의 수에 차이가 있고, 재산액 등 경제적 처지에 차이가 나는데도 가호마다 균등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형평성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조위(曹魏) 이후 가호를 재산에 따라 등급화 한 호등제를 실시하고, 호별로 차등을 두어 세금을 부과하는 호조제(戶調制)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 자료에 보이는 ‘구품혼통(九品混通)’이나 ‘구품상통(九品相通)’이 바로 가호를 재산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과세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의 조세 징수방식을 전하는 중국의 『주서(周書)』나 『수서(隋書)』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인별로 포(布) 5필과 곡(穀) 5석을 거두고, 상호에 1석, 중호에 7두, 하호에 5두를 거둔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에서 가호를 3등호로 구분하고 호등에 따라 1석, 7두, 5두씩 차등 수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별 세금에 비해 호별 세금이 매우 적고, 더욱이 호등에 따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아, 당시까지는 아직도 인별로 거두는 인두세가 중심이었고 호등을 대상으로 한 세금은 부가적인 수준에 그쳤다고 여겨진다.

최근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에서 발굴된 561년 이전에 작성된 「신라의 세금 꼬리표목간」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도 역시 인별로 균액의 곡물을 세금으로 수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 신라의 사례로 볼 때, 삼국시대에는 백제 역시 인두세에 입각해 수취했다고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일반 농민들은 대체로 토지 소유규모가 작았고 철제 농기구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두세에 입각한 가혹한 수취구조로 인해 흉년이 들면 고리대로 연명하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유리걸식하거나 결국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7세기 들어 삼국 간에 격화된 전쟁으로 인해 농민의 계층분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농민안정책을 실시하고 농민들을 호적(戶籍)에 등록해 그들의 유망(流亡)과 몰락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호적상의 호(戶)는 단순히 가(家)나 가족과 같은 뜻은 아니다. 관부(官府)에 의해 한 집안으로 파악되어 등록된 호적의 가호는 혈연가족뿐만 아니라, 경제적 주종(主從) 관계까지도 포괄하여 편성된다.

이러한 국가적 편호(編戶)는 기층사회를 조직하는 행정 단위이면서, 동시에 각 가호가 개별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는 최소의 재생산 단위로 기능한다. 3등호제에 입각한 고구려의 수취제도는 비록 부가세적 수준이었지만, 인두세에서 각 가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삼국의 수취제도가 변해가는 단초를 보여준다.

일본 토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신라촌락문서」를 보면, 당시 신라에서는 ‘호(戶)’를 ‘연(烟)’이라 표기하였는데 각 가호를 중하연(仲下烟)에서 하하연(下下烟)까지 등급화 해놓아 9등호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각 촌락마다 서두에는 계연(計烟) 수를 기록해놓았는데, 이 수치는 각 호등별로 차등 부과된 기본 액수와 해당 가호의 수를 곱하고 이를 전부 합해서 계산한 수치라는 점이 밝혀졌다. 각 호등에 부과된 기본 액수는 중상연을 1로 하여 호등이 가감될 때마다 1/6씩 증감된다.

이로 보아 신라의 9등호제는 가호별로 세금을 차등 수취하기 위해 마련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9등호제는 위진 이래 중국의 호등제를 본뜬 것이지만, 신라가 이를 실시한 시기와 호등의 등급기준은 명확히 알 수 없다. 삼국통일전쟁을 전후해 신라에서는 율령격식에 대한 개정 사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일반적으로 7세기 중반 태종무열왕, 문무왕대에는 9등호제에 입각한 수취제도가 실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신라 9등호제에서 호등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당과 같이 재산의 다과(多寡)로 보는 견해, 인정(人丁) 즉 노동인구의 수를 강조하는 견해, 가호가 소유한 토지의 다과에 의해 구분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연령등급제가 실시되고 있었고,「신라촌락문서」에 토지보다 인정에 대한 기록이 아주 상세하다는 점에서 대체로 인정을 중심으로 한 재산의 다과가 호등 구분의 기준이 아니었나 보고 있다.

고려에서는 토지세가 국가의 주요한 세원으로 부각되면서 인정이나 가호가 아닌 토지 자체가 과세대상으로 철저하게 조사, 등록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에서도 9등호제가 확인되지만, 호등제는 단지 가호별로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을 고려하여 역역을 차등 부과하는데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말선초에는 군역을 편제하기 위해 3등호제, 5등호제 등이 활용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준(趙浚) 등의 건의로 대 · 중 · 소로 구분된 3등호제, 1435년(세종 17)에는 대 · 중 · 소 · 잔(殘) · 잔잔(殘殘)으로 구분된 5등호제가 실시되었다.

역사적 의의

통일신라시대에 실시된 9등호제에 입각한 수취제도는 삼국시대에 인두세를 3등호제로 보완했던 세제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인두세의 비중이 컸지만, 호등제 즉 재산의 차이에 따라 부과된 세제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삼국시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고대적인 인두세 체제를 탈피해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의 중대 왕권은 이 같은 변화 위에 통일전쟁의 격화로 농민의 계층분화현상이 심각해지자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고 국가의 세수를 안정화하기 위해 기존의 인두세 중심에서 각 가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수취제도를 혁신하였다.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되는 9등호제와 계연의 수치를 통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에서는 가호의 재산을 고려하는 세제가 한 단계 더 진전되어, 가장 중요한 재산인 토지 자체에 세금이 부과되는 방향으로 변모해갔다. 이로 인해 이때부터 호등제는 요역이나 군역차출에 활용되는 부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다가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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