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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때 법당(法幢) 군단에 징발된 가호(家戶)의 군역(軍役)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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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통일신라 때 법당(法幢) 군단에 징발된 가호(家戶)의 군역(軍役) 표기.
내용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 내 살하지촌(薩下知村)의 각 가호에 여자(余子)·법사(法私) 등이 세주(細注)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화랑제도와 관련시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라의 법당(法幢) 군단에 징발된 가호에 그 군역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법사 표기는 해당 가호의 장정이 법당 군단 가운데 ‘법(法)’자를 가진 부대, 예를 들어 외법당(外法幢) 등과 같은 재지 부대에 차출되어 농민 군사로 편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군역 차출 때 호등에 따른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가호의 빈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각 가호별로 장정 1명이 균등하게 징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사와 같은 군역 표기가 「신라촌락문서」내 1개 촌락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군역징발이 3년을 단위로 각 촌별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문서 내의 이러한 표기는 이 촌락에 대해 다른 역역(力役)의 징발이 면제되거나 감액되도록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법당 군단에 차출된 병졸의 군역 기간은 문서의 작성주기인 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달리 살하지촌만이 법당 군단에 편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촌락의 농민장정들이 법당에 편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법당 군단은 6세기 초에 창설되어 크게 삼십구여갑당(三十九餘甲幢) 등과 같은 지방 부대와 사설당(四設幢) 등과 같은 특수부대로 구성되었다. 법당은 지방의 촌락사회를 기초로 하여 촌주(村主)들이 편성, 장악한 부대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6세기 전반경 신라 전역에 걸쳐 50여 곳의 특정한 군사적 거점에 배치한 기본적 군단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쇠퇴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신라촌락사회사연구』(이인철, 일지사, 1996)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김기흥, 역사평론사, 1991)
「영천청제비 정원수치기의 고찰」(이기백,『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統一新羅の村制について」(明石一紀,『日本歷史』322, 1975)
「新羅の村落」(旗田巍,『歷史學硏究』226·227, 1958·1959:『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部, 1972)
집필자
윤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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