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와 상 · 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지세력이 대거 낙선하자, 이승만은 당시의 국회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서는 자신의 재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1952년 실시될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임하고자, 이승만은 1951년 8·15기념사에서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의 개헌 필요성을 역설한 뒤, 한편으로는 신당의 조직을 추진하고,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신당창설운동은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원외 자유당과 원내 자유당이라는 두 개의 정당을 만들어내었고, 이 중 원내 자유당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는 하나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실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52년 1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이승만은 국회 내 지지세력이 극히 미약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외 자유당을 비롯한 국회 외부의 세력을 동원,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 등의 관제 데모를 전개하여 국회에 압력을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는 원내 자유당 93명 중 48명,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39명, 민우회(民友會) 25명, 무소속 15명 등의 연합으로 재적의원 3분의 2보다 1명 초과한 122명의 연서로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원외 자유당과 18개 단체대표들이 ‘내각책임제개헌안반대 전국정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정부는 4월 20일 야당계 거물인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해임하고 국회부의장 장택상(張澤相)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다. 국회에서는 5월 6일 양측 개헌안의 조정을 맡고 나선 장택상을 95 대 81로 승인하였다.
이때 지방선거 시찰차 떠난 무소속의 내각책임제 추진파 서민호(徐珉濠)가 전라남도 순천에서 언쟁 끝에 현역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5월 12일 국회의 석방결의에도 불구하고 서민호를 구속기소하는 한편, 5월 14일이승만 대통령이 1월 18일 부결된 정부 개헌안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제출하였다. 5월 19일원내 자유당 합동파 52명은 새로운 교섭단체로 등록하였고 40여 명의 자유당 잔류파(간부파)는 민우회와 합작하여 장택상을 중심으로 친목단체 신라회(新羅會)를 만들었다.
5월 15일 이래 정부에 의해 동원된 민족자결단 · 백골단 등의 폭력조직을 비롯한 관제 데모대가 국회의원소환 · 국회해산 등을 연발하며 연일 부산거리를 누볐다.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의 집까지 포위하였다.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의 민족청년단장 이범석(李範奭)을 내무장관에 임명하고, 5월 25일에는 경상북도 · 전라남도 · 전라북도 일대에 공비토벌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결의로 석방되었던 서민호 의원을 재구속하였다.
5월 26일에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강제연행되었고,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0명의 국회의원이 붙잡혔다. 또한 각 도의회에서는 국회해산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이범석과 국회 내의 신라파가 중심이 되어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구속중이던 10명의 국회의원이 석방되고 피신중이던 국회의원들도 경찰의 연행에 의하여 동원되어 며칠씩 연금되는 테러 속에서, 7월 4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발췌개헌은 ①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위배되고, ② 공고되지 않은 개헌안이 의결되었고, ③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고, ④ 의결이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