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

장준하
장준하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잡지 『사상계』를 간행하여 사장이 되었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언론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8년
사망 연도
1975년 8월 17일
출생지
평안북도 삭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민주화운동가이다. 1918년 평안북도 삭주 출생으로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해 광복군이 되었다.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입국 후 1952년 『사상』을,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복역하던 중 옥중 출마해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연이은 민주화운동으로 10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75년 등산 중 의문사했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잡지 『사상계』를 간행하여 사장이 되었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언론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평안북도 삭주 출생.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張錫仁)이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쓰저우[徐州]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해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1월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곧바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특히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특파되었으나 작전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광복 이후 잡지 『사상계』를 간행하였고,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옥중 당선으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의문의 등산 사고로 사망했다.

생애와 활동사항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를 거쳐 도쿄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金俊燁)의 도움으로 중국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린취안(臨泉)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약칭 한광반)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여가를 이용해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한광반의 훈련에 한계를 느끼고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2개월간 혹한, 배고픔과 사투를 벌인 끝에 1945년 1월 30일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도착 후 시안[西安]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李範奭) 휘하에 배속되었고,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區司令部) 웨드마이어(Wedemeyer, A. C.) 휘하에서 미국 전략정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특히 국내의 후방에 침투할 목적으로 조직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에 자원해 수송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한편 이곳에서도 교포들의 친목잡지인 『제단(祭壇)』 초판 300부를 발간했다.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이 되었으나,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1951년 1 · 4후퇴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을 창간했다. 이어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연이은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사망 경위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기록 폐기, 수사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 · 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그의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매년 1∼2회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따라 가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행사를 열고 있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12년 8월 파주시가 추모공원으로 조성한 통일공원으로 옮겨졌다.

참고문헌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10차 장정 완수 기념 백서』(장준하기념사업회, 2004)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1988)
『외길 한평생』(장학사, 1981)
『돌베개』(장준하, 1971)
「장준하와 독립운동」(조동걸,『우사 조동걸 저술전집』11, 2010)
「제2공화국과 장준하」(김기승,『한국민족운동사연구』34, 2003)
「분단체제 타파에 몸 던진 장준하」(서중석,『역사비평』38, 1997)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www.peacewave.or.kr)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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