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2월 김약연(金躍淵)과 김정규(金貞奎), 문치정(文治政), 남위언(南韋彥) 등 총 114명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주해 명동촌(明東村)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1906년 당시 용정촌(龍井村)에서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신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1년 만에 중단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약연과 김학연(金學淵) 등의 애국지사들은 인근 지역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던 용암촌의 규암재, 대룡동의 소암재, 상중용천의 오룡재 등의 사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웠다. 초대 숙장(塾長)으로 박무림이 취임하였고,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교원으로 김학연과 남위언을 포함해 김하규(金河圭), 여준(呂準) 등이 부임해 주1에 모였던 4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에서 파견된 북간도교육단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명동서숙의 체재를 새롭게 하여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신교육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또 근대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재래의 유교보다는 참신한 기독교가 나으며, 북간도의 특수 사정상 중국과 일제의 견제를 보다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명동서숙은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었고, 학교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었다.
1909년 4월 명동서숙에서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어 명동학교가 새롭게 설립되었다. 교장으로 김약연이 취임하였으며, 성경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다. 명동학교에는 북간도 일대뿐 아니라 연해주와 국내의 회령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1910년 3월에 중학 과정이 증설되었고, 1911년에는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촌에 와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여학교를 병설하게 되었다. 교사에 정신태(鄭信泰)와 이의순(李義橓), 우봉운(禹鳳雲) 등이 취임해 여성 교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은 1913년 삼국부인전도회를 조직해 교회 연합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명동학교에는 1911년에는 160여 명의 학생들이, 1914년에는 180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하였다. 1910년대 명동학교 교사로는 정재면(鄭載冕)과 남위언, 김하규, 문재린 등 약 50여 명이 근무하며 근대 교육을 시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주민들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이와 같은 항일교육에 대해 일제는 명동학교를 ‘조선인 독립운동의 소굴’이라 하였고, 1920년 10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여 학교를 소각하고 교장을 구속하였다. 그 뒤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인해 1925년에 폐교되었다.
명동학교에서는 소학 과정과 중학 과정으로 국어 · 동국역사 · 성경 · 교육학 · 창가 · 체조 등을 비롯해 역사 · 지지(地誌) · 법학 · 지문(地文) · 박물(博物) · 이화(理化) · 생리(生理) · 수신 · 수공(手工) · 신한독립사 · 위생 · 식물 · 사범교육학 · 농림학 · 광물학 · 외교 · 통역 · 대한문전 · 신약전서 · 중국어 · 작문 · 습자 · 산술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학교교육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중 상당수는 조선총독부가 내린 “불인가 교과용도서 및 발매 배포 금지 도서”로, 『유년필독』과 『오수불망』, 『대학사략』,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 등을 사용하였다. 교육목표는 항일 독립 정신에 두었는데, 한 예로 입학시험 및 작문 시험에는 반드시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포함하였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토론회를 열어 민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밖에도 명동학교 주도의 운동회, 졸업식과 애국지사의 연설, 야학 교육과정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계몽 정신을 일깨우는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개교 이래 17년 동안 1,20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이 명동학교를 졸업하였다. 명동학교는 서전서숙과 함께 재만 한국인을 위해 민족교육을 시행한 교육기관이었다. 민족교육기관의 원조로서, 독립운동가 및 민족교육자를 배출하여 재만 한국인 사회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