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1909년 4월, 북간도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
설립 배경
1909년 신민회(新民會)에서 파견된 북간도교육단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명동서숙의 체재를 새롭게 하여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신교육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또 근대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재래의 유교보다는 참신한 기독교가 나으며, 북간도의 특수 사정상 중국과 일제의 견제를 보다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명동서숙은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었고, 학교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었다.
변천 및 현황
명동학교에는 1911년에는 160여 명의 학생들이, 1914년에는 180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하였다. 1910년대 명동학교 교사로는 정재면(鄭載冕)과 남위언, 김하규, 문재린 등 약 50여 명이 근무하며 근대 교육을 시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주민들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이와 같은 항일교육에 대해 일제는 명동학교를 ‘조선인 독립운동의 소굴’이라 하였고, 1920년 10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여 학교를 소각하고 교장을 구속하였다. 그 뒤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인해 1925년에 폐교되었다.
교육 활동
학교교육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중 상당수는 조선총독부가 내린 “불인가 교과용도서 및 발매 배포 금지 도서”로, 『유년필독』과 『오수불망』, 『대학사략』,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 등을 사용하였다. 교육목표는 항일 독립 정신에 두었는데, 한 예로 입학시험 및 작문 시험에는 반드시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포함하였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토론회를 열어 민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밖에도 명동학교 주도의 운동회, 졸업식과 애국지사의 연설, 야학 교육과정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계몽 정신을 일깨우는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북간도지역 한인 민족운동: 명동학교 100주년 기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논문
- 한강희, 「일제하 북간도 명동학교의 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와 근대 국가 개념」(『신학사상』 184, 한신대학교 신학사상연구소, 2019)
주석
-
주1
: 규암재, 소암재, 오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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