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여준(呂準)·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홍창섭 등의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길현(延吉縣) 육두구(六頭溝) 용정촌에 설립하였다.
이상설이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개수하였으며, 학교명은 서전평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면적은 231m²로 정도의 규모에 학생 22명으로 출발하였다. 숙장은 이상설이,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맡아보았으며, 교사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달영 등이었다.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이상설은 ≪산술신서≫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교육내용은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용정 외에도 온성·종성·회령에 이르기까지 교포들을 방문하여 신교육 및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서전서숙의 설립목적 등을 역설하며 자제들을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었으며, 그 뒤에는 갑반에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으로 분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해지는 학생들의 명단을 보면 갑반에 윤정희(尹政熙)·이병휘(李丙徽)·윤규한(尹圭漢)·김정문(金鼎汶)·남세극(南世極)·채우석(蔡禹錫)·이근용(李瑾鎔)·구자승(具滋昇)·구정서(具貞書), 을반에 김학연(金學淵)·박일병(朴一秉)·오병묵(吳秉默)·이정휘(李庭徽)·박효언(朴孝彦)·구자익(具滋益)·박세호(朴世豪) 등이 있었고, 소속을 알 수 없는 남위언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되자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또한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당시 통감부출장소 소장은 흉계를 감춘 채 회유책으로 매월 보조금을 내겠으니 서숙을 계속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일축한 학교측은 문을 닫고 혼춘 방면으로 떠났다가 갑반 학생들만 데려다 탑두구(塔頭溝)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졸업식을 올린 뒤 해산하고 말았다.
이 같이 비록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기관으로서, 그 뒤 북간도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노령 연해주, 한국 내의 각 지역에서 우리의 민족교육이 일제식민교육정책과 대항하면서 발전, 성장해 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전서숙의 설립목적이 일반적인 신교육실시가 아니라 민족교육을 통한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