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천묵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북로군정서 부총재, 간북북부총판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였고, 한인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에 힘쓴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이칭
백취(白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28년
본관
수원(水原)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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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북로군정서 부총재, 간북북부총판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였고, 한인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에 힘쓴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백취(白醉). 함경북도 경성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서일(徐一)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여 1911년 1월 참교(參敎), 1913년 4월 지교(知敎), 1917년 5월 상교(尙敎), 1927년 1월에는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질(陞秩)하였으며, 대종교인으로서 재만한인(在滿韓人)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8월 서일·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 본영(本營)을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吉林省汪淸縣西大波溝)에 두었으며, 12월 군정부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되자 부총재직을 맡고 총재 서일과 함께 독립군의 병력 증강에 노력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재만독립군의 재편성 과정에서 결성된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의 부총판(副總辦)으로 취임, 크게 활약하였다.

1925년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의정원(臨時政府議政院)에서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음 해 10월 10일 다시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길림성 연길현을 중심으로 여러 동지들과 함께 한인교육회(韓人敎育會)를 조직, 항일독립운동을 위하여 후세의 민족교육에 전력하다가 죽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자료집』1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독립운동사』5·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6)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동아일보』(1923.3.6, 1926.2.26)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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