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배경은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충격받은 안정수(安定洙)·김찬일(金燦一)·유성춘(柳成春, 또는 柳鴻朝)·김우제(金愚濟)·변창수(邊昌洙)·김승제(金承濟)를 비롯해 장경(張景)부부·김미리사(金美理士, 일명 차미리사)·이병호(李炳瑚)·서택원(徐澤源)·방사겸(方四兼)·이병준(李炳俊) 등이 국민계몽과 국권회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12월 9일에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배재보국(培栽保國)을 통해 문무의 정신으로 군민(軍民)의 자격을 양성하고 군국(君國)을 보위하는 주의(主義)로 원기를 보전한 다음에야 외환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대체로 보황적(保皇的)인 면이 강하였다.
주요 활동은 청년을 대상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양성에 주력해 해외유학생 양성과 서적출간 등에 힘을 기울였다. 회원은 1906년 중반까지 40∼50명 정도였으나 이 해 말에는 300여 명 정도로 확대되었다.
회장은 김우제가, 총무는 장경이 맡았으나 실제로 단체를 주도한 인물은 장경이었다. 대동교육회는 파사디나에 위치한 중앙회를 비롯해 로스엔젤레스와 새크라멘트에 각각 지방회를 두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한인교포들의 이주가 증가하자 1906년경 중앙회를 이곳으로 옮겼다.
1907년 1월 경 대동교육회는 교육 외에 실업과 자치 그리고 의열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꾀하고자 장경·김우제·이병호·문양목·장인환·양주은·백일규 등의 발기로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에 따라 이 단체는 1905년 4월 5일 안창호에 의해 조직된 공립협회와 함께 북미지역 한인 사회에 항일민족운동의 주력 단체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