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빈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행성낭중, 우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문야(文野)
시호
강경(康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88년(충렬왕 14)
사망 연도
1353년(공민왕 2)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행성낭중(行省?中)
관련 사건
조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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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행성낭중, 우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야(文野). 추성익대좌거공신(推誠翊戴 佐?功臣) 홍윤심(洪允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김지(金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가 원나라의 연경에 살았기 때문에 홍빈은 일찍부터 원나라의 내정(內庭)에서 숙위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장관의 천거로 대도로패주동지(大都路覇州同知)에 제수되었으며, 1329년 송강부판관(松江府判官)·도로감경력(都路監經歷)·대상의례원경력(大常儀禮院經歷)을 역임하였다.

이 때 충숙왕이 참소를 당해 폐위되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왕을 위해 사력을 다하여 그 억울함을 변호하였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왕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왕은 홍빈을 고려에 머무르게 하고자 원나라에 주청하여 정동성이문소관(征東省理問所官)을 제수하고, 도첨의찬성사 판군부사(都僉議贊成事判軍簿事)에 임용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숙왕이 죽자 유명에 의해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에 보임되었다. 그 해에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켜 충혜궁(忠惠王)이 있는 궁을 습격했는데, 이 때 홍빈도 그들의 강요에 의해 난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여 조적은 죽고, 홍빈도 순군(巡軍)에 잡혔으나 특별히 사면을 받았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조적 일당의 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되자 함께 잡혀갔다. 그러나 홍빈이 왕에 대한 무고가 사실이 아님을 변호하였고, 이에 충혜왕은 다시 복위해 이듬해 귀국하였다.

왕은 그 공의 포상으로 홍빈을 1등공신에 책록하고 당성군(唐城君)에 봉했으며, 또 행성낭중(行省郎中)을 제수하였다. 충목왕 때 원나라에 돌아가 흥국로총관(興國路摠管)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에 귀국하자 우정승에 임명되고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공신(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功臣)의 호를 받아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홍언박(洪彦博)·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정사를 논의했으나, 얼마 뒤에 사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출사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하였다. 이에 재추(宰樞)들이 홍빈의 집에 모여 다시 청하자, 출사했다가 얼마 뒤 사퇴하고 죽었다. 시호는 강경(康敬)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익재난고(益齋亂藁)』
『목은집(牧隱集)』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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