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1383년(우왕 9) 10월에 병마사로서 도원수 이을진(李乙珍), 부원수 권현룡(權玄龍)과 함께 동산현(洞山縣)에 내침한 왜구를 쳐서 20여 명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였다. 이 공으로 왕으로부터 백금 50냥을 받았으며, 다음 해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의 측근으로 활약, 1388년 위화도회군 때 개성에서 최영(崔瑩)의 군대를 격파하고 궁중으로 들어가 화원(花園)의 팔각전(八角殿)을 포위해 최영을 붙잡아 유배시켰으며,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 11월에 당시 황려(黃驪: 지금의 驪州)에 유배되어 있던 우왕이 최영의 생질인 김저(金佇)·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할 모의를 한 뒤 곽충보에게 이를 부탁하자, 거짓으로 이를 승낙하고 곧 이성계에게 밀고해 이들을 소탕하였다. 이로 인해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폐서인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해 음성(陰城)·안성(安城)·죽주(竹州)·괴주(槐州)에 이르자, 당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 자윤(慈尹) 이방과(李芳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과 함께 이들을 영주(寧州)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해 공을 세웠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현(文化縣)·영녕현(永寧縣)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해 공을 세웠다.
1399년(정종 1)에 아들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사사로운 감정으로 황문(黃文) 등을 처벌한 것을 계기로 탄핵을 받아 청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1402년에 도총제(都摠制)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