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가게 된 왕을 호종하여 3등공신에 오르고, 1363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당시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5월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화주(和州)에 진을 치고 동북을 방비하였다. 1364년 정월에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삼살(三撒) 지역을 약탈하자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과 함께 진격하였으나, 패전하여 후퇴하다가 철관(鐵關)에서 방어하였다.
다음 달에 동북면에서 이성계(李成桂)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이에 합세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잃었던 화주·함주(咸州) 등을 모두 수복하게 되었다. 이 싸움의 전공으로 왕으로부터 금대(金帶)를 받았다.
1365년 정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는데, 당시 신돈(辛旽)의 횡포에 대하여 이구수(李龜壽) 등과 같이 이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신돈의 미움을 받아 같은 해 6월에 금주(金州)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8월에 노산사(盧山寺)에서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