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공민왕 11) 1월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였을 때에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휘하장군으로서, 안우(安祐)·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무찌르고 서울을 탈환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무공을 세웠다.
이 해 4월 밀직부사로 전라도진변사(全羅道鎭邊使)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다. 1363년 3월에는 홍건적의 침입 때 병사들을 소집해 왕을 보좌한[僉兵輔佐] 공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1등공신이 되었고, 윤3월에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이 해에 역신 최유(崔濡) 일파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들어오리라는 정보 때문에 도순찰사가 되어 인주(麟州: 지금의 의주)에 주둔, 1364년 압록강에서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1만의 최유 군대를 격파하고 개선하여 찬성사에 올랐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서원(瑞原)의 고령사(高領寺)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였으나 왕의 만류로 복직하였다. 1365년 4월 왜구가 강화도 교동을 노략질하고 동강과 서강에까지 침입하자 찬성사로 군대를 지위하여 왜구를 무찔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구가세족(舊家世族)으로 지목되어 양백익(梁伯益)·박춘(朴椿) 등과 함께 제1차로 숙청되어 회원(會原)에 유배되었고, 1366년(공민왕 15) 신돈에 의해 머리를 깎이고 송광사에 유폐되었다가 이듬해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살해되었다.